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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토)

이슈 세계와 손잡는 K팝

‘콩글리시’는 K팝의 걸림돌 아닌 매력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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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언어학자가 한글로 쓴 ‘K팝 백과’

서태지부터 5세대 가수까지 분석

조선일보

K-POP 원론: 말, 소리, 빛, 신체성이 어우러진 21세기형 종합예술

노마 히데키 지음|연립서가|712쪽|3만3000원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두 가지에 놀란다. 첫째는 일본인이 번역가 없이 처음부터 한국어로 쓴 책이란 점. 둘째는 400여 개의 K팝 영상을 분 단위로, 그룹의 착용 의상과 안무까지 상세히 분석한 저자가 음악 평론가도 아닌 언어학 교수란 것. 1953년 일본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한일 양국에서 손꼽히는 ‘한국어 학자’다. 함경도 출신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로부터 양국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스무 살까지 이 사실을 몰랐고 한국어는 독학으로 시작했다. 1983년 서른 나이에서야 도쿄외국어대학교 조선어학과에서 수학한 그가 2010년 출간한 ‘한글의 탄생’은 한글 연구자들 사이 필독서가 됐다.

이런 그가 이번에는 K팝의 맛에 푹 빠졌다. 그것도 책 제목이 ‘K팝 입문서’였어도 낯설지 않을 수준의 애정이 엿보인다. 첫 장부터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로 시작된 1세대부터 최신 5세대까지 방대한 양의 K팝 그룹을 국내 4대 기획사(하이브, SM, JYP, YG)에 맞춰 분석한 ‘K팝 역사지도’가 등장한다. 자신이 주요 예시로 쓴 400여 개의 K팝 유튜브 영상마다 접속 QR코드와 추천 별점을 붙였고, 마지막 장에선 아예 843편의 K팝 뮤직비디오 추천 리스트를 제시했다. 곳곳에는 도쿄교육대에서 미술을 공부한 작가 경력을 살려 K팝 스타들의 인물화도 직접 그려 넣었다.

조선일보

지난 6월 유튜브 조회 수 17억회를 넘긴 걸그룹 블랙핑크의 노래 ‘붐바야’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저자는 이 노래의 ‘네가 말로만 듣던 걔가 나야 Jennie(블랙핑크 멤버 제니)’ 가사를 ‘K팝의 다원주의적 미학’의 대표적 예시로 든다. 그룹 형태로 활동하면서도 ‘나’를 주로 노래하는 K팝의 독특한 구조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것이다. /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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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인 저자가 유독 K팝 영상에 천착한 건 이 장르의 본질을 ‘21세기의 지구형 공유 오페라’로 보기 때문이다. K팝이 음악과 예술을 혼자만 보는 게 아닌, 유튜브 영상으로 실시간 공유하며 즐기는 ‘랩넷(LAVnet)’ 시대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K팝은 혁명”인 이유로 “좁은 극장을 부수고 무대와 객석의 경계도 없애며 24시간 지구상을 극장화하고, 때로는 손바닥 안 조그마한 디바이스(스마트폰)까지 극장”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K팝 영상 속 ‘칼군무’는 디지털 세계에는 존재할 리 없던 ‘신체성’을 강화시킨 획기적인 방식이다.

동시에 K팝을 ‘영상 시대에도 여전히 언어의 중요성을 대두시키는 존재’로 본 해석도 흥미롭다. K팝 유튜브 영상마다 다국적 언어로 쓰인 제목과 댓글, 때로는 다국어로 번역된 가사들이 퍼져 나가면서 큰 파급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저자가 본 K팝의 세계적 흥행 요소도 바로 ‘한국어 말맛’에 있다. 글자 수와 발음할 때 음절 수가 같아 가사에 음을 밀도 있게 담아내는 강점을 지녔다는 것. 음절 끝이 모두 딱딱 끊기게 들리는 ‘비개방 자음’으로 떨어지고, 후두의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된소리와 성문 폐쇄음을 많이 쓰는 것도 한국어의 장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특성이 때론 K팝 속 영어 가사조차 색다르게 만든다. 제목과 동명 가사가 반복되는 스트레이키즈의 노래 ‘매니악(Maniac)’도 한국식으로 발음을 ‘악’으로 끊어 부른 게 리듬을 더 잘 살린 경우다. 만일 영어식으로 끝 음을 부드럽게 ‘매이니악(Meɪniæk)’으로 불렀다면 그 맛이 달라졌을 거란 분석이다. 한때 국내 가수들의 ‘콩글리시 발음’이 해외 진출 걸림돌이라고 여겼던 편견을 깨는 진단이다. 총격 소리를 흉내 낸 블랙핑크 노래 ‘뚜두뚜두’처럼 의성의태어와 간투사(감탄사)가 풍부한 것도 한국어 노래의 매력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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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미학 구조의 K팝 영상으로 꼽힌 BTS의 ‘피 땀 눈물’ 뮤직비디오. /빅히트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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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본 K팝의 또 다른 중요축은 바로 ‘다원주의’다. 대부분의 K팝이 그룹의 형태로 여러 멤버의 목소리를 중첩해 쓰면서도, 개개인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K팝의 위기 요소로 ‘수익 극대화를 위해 지나치게 멤버 수를 늘리는 것’을 꼽은 것도 흥미롭다. 그는 멤버들의 개성을 잘 살리기에 적합한 숫자를 ‘4~5명 수준’으로 제안하며 ‘모두가 7인조 방탄소년단처럼 성공할 순 없다’고 강조한다.

일본 음악계와 K팝 음악계를 교차 비교한 장면들도 이 책의 진가다. K팝 스타들의 영향으로 일본 내 한일 역사 공부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 게 반갑다면서도, ‘반일’을 단순히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실수를 피해야 한다는 조언도 새겨들을 만하다.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것’과 ‘반일적인 사상을 품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일본 내 K팝 한류를 둘러싼 다양한 호감과 반감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

저자 스스로 적었듯이, K팝의 자본주의적 요소를 지나치게 배제한 건 다소 아쉬운 점이다. 수익 극대화 전략으로 곡 길이가 점점 줄어드는 등 K팝의 미학·언어적 구조 자체에 자본이 미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1996년 서울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집회 현장에 ‘아침이슬’이 울려 퍼진 모습을 직관한 저자의 시각은 그 자체로도 한국 대중음악사 연구의 귀한 자산일 것이다. 이 책의 개정판이나 후속작에 더 많은 K팝 이야기가 담기길 기대하게 되는 이유이다.

[윤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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