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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토)

‘잃어버린 30년’ 日 아베의 최대 실수는…이 남자 말에 귀기울였다면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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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노믹스 화살 맞아 낙마
‘매파’ 성향의 前 일은 총재
돈풀기 정책 조목조목 반박

장기간 계속 물가 내린건
일자리 유지 해주는 대가로
제한된 임금 인상 받은 탓

일본 경제 구조적 문제는
환율 보다 급속한 고령화


매일경제

일본 수도 도쿄의 상업지구인 긴자 풍경 [사진 출처 = 연합뉴스]


1989년 마지막 거래일 닛케이 지수는 3만8915포인트를 가리켰다. 이 수치엔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다. 지수는 보란 듯이 미끄러지더니 1992년 10월 18일에는 1만4309포인트까지 주저앉았다. 최고점 대비 60% 이상 폭락했다.

부동산 버블 붕괴는 뒤늦게 시작됐다. 가장 상승세가 컸던 오사카 상업 지구 땅값은 1991년 1월 정점을 찍었다가 2002년 최고치의 10분의 1까지 떨어졌다. 이 정도 폭락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1990년부터 2000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렀다. 하지만 잃어버린 기간은 계속 늘어 이제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수식어가 일본 경제를 따라다닌다. 돈을 무한정 푸는 아베노믹스도 결국 해법은 아니었다. 전 세계 각국이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피벗’을 단행하고 있지만 일본은 긴축 페달을 밟으며 ‘나홀로 역주행’을 하고 있지 않나.

여기 아베노믹스의 화살을 맞아 낙마한 비운의 일본은행 총재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인 2008년에 취임해 아베노믹스에 저항하다 2013년에 물러난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 方明·75)다. ‘매파’ 성향인 그는 5년 재임 중 소극적인 통화정책으로 거센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다. 2008년 10월 31일과 12월 19일 두 차례에 걸쳐 정책금리를 0.2%포인트씩 내려 0.1%로 끌어내렸으나 인하 폭이 유럽과 미국의 중앙은행보다 작았고, 늦장대응이라는 비판도 일었다. 하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최근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그의 회고록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곳곳에서 피력한다.

중요한 것은 시대의 여론에 휩쓸리지 않는 뚝심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일본의 단기 금리는 1990년대 중반에 이미 0%에 가까워 ‘사실상 제로금리’ 시대가 열렸다. 그러다 2000년 8월 통화정책회의에서 정책 금리가 0%에서 0.25%로 인상됐다. 이 결정은 뼈아픈 오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섣부른 제로 금리 종결이 일본의 만성 디플레이션을 초래했다는 평가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2001년 3월 “일본 경제가 가벼운 디플레이션에 빠져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시라카와 전 총재가 보기에 이러한 선언이야말로 가장 잘못된 정책적 실수였다. 디플레이션이 만병의 근원으로 인식됐고,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디플레이션 정의에 있었다. 종전에는 물가 하락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발생했을 때 디플레이션이라고 간주했는데, 이제는 물가 하락만으로도 디플레이션이라고 규정하는 새 풍토가 만들어졌다. 마치 통화량 조절이 만능키처럼 인식됐다는 얘기다. 단순히 돈을 찍어내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대중의 머리에 심어주었다.

매일경제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가 보기에 장기간에 걸쳐 물가가 계속 하락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일자리 유지 대가로 제한된 임금 인상을 받아들인 탓이었다. 경기침체 시에는 보통 실업률이 치솟아야 하는데 일본은 종신 고용 문화로 해고가 자유롭지 않다. 결과적으로 실업률 급증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임금 하락에 따른 완만한 물가 하락에 직면하게 됐다는 것이다.

엔고 현상도 그를 구석으로 몰아놓았다. 2011년 10월 엔달러 환율이 75엔을 기록하자 일본 재계는 ‘국난’이라며 아우성을 쳤다. 자동차와 전자업계 비판이 거셌다. 대기업 경영자들은 그에게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엔·달러 환율이 아니라 엔·원화 환율”이라며 “비정상적인 엔고·원저 환율이 시정되기만 하면 삼성 등 한국 기업에 대한 일본 기업의 경쟁력은 회복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선량한 기업인들이 ‘머니 게임의 희생양’이 됐다는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엔화 약세 기간에도 일본의 수출 경쟁력은 회복되지 못했다며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한다.

오락가락하는 환율보다 더 구조적이면서 본질적인 문제는 급속한 고령화와 일본 산업의 경쟁력 저하였다는 진단이다. 1990년대 세계 경제를 휩쓸었던 세계화와 정보기술(IT) 기술 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일본 기업은 따라가지 못했다. 버블 붕괴 후 생존이 급선무여서 미래를 위한 선제적인 투자와 혁신의 기회를 놓쳤다는 얘기다. 여기에 기업들은 종신 고용제 아래 발목이 잡혀 노동력을 유연하게 재배치하지 못했다.

일본은 지금 다시 변곡점에 놓여 있다. 새로 취임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아베노믹스와 거리를 둔 채 통화긴축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도 일본의 긴축 속도에 따라 출렁일 것이다. 세계 주요국은 2008년 이후 양적 완화와 무제한 돈풀기의 후유증으로 살인적인 고물가에 시달리고 있다. 시라카와 전 총재의 신중한 통화정책이 재평가를 받는 이유다.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책 제목 자체가 우리에겐 생생한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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