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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월)

"다 보고 있다"…국정원, 北파병 기밀 이례적 공개 '북∙러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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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기밀 해제’(Strategic declassification)는 경쟁자를 약화하고, 동맹을 결집하기 위해 특정 기밀을 의도적으로 일반에 공개하는 것으로, 이는 정책입안자들에 보다 강력한 도구가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러시아에 대한 정보심리전을 이끈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지난 1월 미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미국 정보계는 정보 외교(intelligence diplomacy)의 가치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을 배우고 있다”며 이처럼 밝혔다.

지난 18일 국정원이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과 관련, 이례적으로 보도자료를 내고 관련 정보를 대거 공개한 건 ‘한국판 전략적 기밀 해제’로 볼 수 있다는 평가다. 북한 특수부대 1500명이 이미 파병된 사실과 북한군 개인의 사진까지 공개했는데, '전례 없는 위협 상황'에 '전례 없는 대응'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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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포착한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 북한군의 모습. 국정원은 해당 북한군 추정 인물 사진을 자체 AI 안면인식 기술에 적용한 결과, 지난해 8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술미사일 생산공장을 방문했을 당시 김정은을 수행한 북한군 미사일 기술자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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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들여다보고 있다” 불안·균열 유발



국정원은 이번에 "러시아 태평양 함대 소속 상륙함 4척, 호위함 3척이 지난 8일부터 13일까지 북한 청진·함흥·무수단 인근 지역에서 북한 특수부대 1500여명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1차 이송 완료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러시아 함정이 북한 특수부대 병력을 이송하는 움직임과 관련, 인공위성 촬영 사진도 공개했다. 외국 위성사진 제공 민간업체인 'AIRBUS'가 제공한 사진과 정부가 운용하는 위성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등 3장을 북한군 파병의 증거로 제시했다. 우크라이나 정보 기관과 협력해 인공지능(AI) 안면인식기술을 적용한 결과, 북한군 미사일 기술자를 특정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군이 투입된 지역이나 부대명까지 자세히 특정한 건 정찰 자산 뿐 아니라 내부 정보에 직접 접근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도·감청이나 휴민트(HUMINT·인적 정보 자산)까지 동원한 결과로 추정된다.

이는 ‘정보는 쥐고 있을 수록 가치가 높아진다’는 과거 공식과는 차이가 큰 접근이다. 최근 정보전에서 부상하는 ‘전략적 기밀 해제’ 기법을 적극 활용한 셈이다. 조태용 국정원장도 지난 7월 국회 정보위에서 "과거에는 군사·안보 분야 정보는 절대 바깥에 노출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평가됐으나, 최근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 추세가 전략적 비밀 공개 형태로써 일부를 공개함으로써 유관 국가의 경각심을 일으켜주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국민의힘 정보위 간사 이성권 의원)고 설명했다.

일례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미국도 러시아의 지상 공격 시점까지 특정한 정보 보고를 우방국과 공유하며(당시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보도) 러시아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부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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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포괄적인 전락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에 서명하고 악수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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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이 정보 자산의 노출 위험까지 감수하고 관련 정보를 공개한 것도 이를 통해 얻는 이점이 더 크다는 판단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보력의 수준을 과시하는 한편 러시아와 북한으로부터 내부의 ‘구멍’을 의심하게 해 불안과 균열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나쁜 짓 비용’ 높이는 효과



남성욱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은 "국정원이 이례적으로 대량의 물증을 푼 건 그만큼 정보의 신빙성에 자신을 갖고 심리전을 펼치겠다는 방증"이라며 "다만 북·러는 국제 여론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마이웨이'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북·러의 행동을 억제하지는 못해도 더 높은 비용을 치르게 하는 효과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은 "북한 특수부대 1500여명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1차 이송 완료했고 조만간 2차 수송 작전이 진행될 예정"이라며 구체적 수송 경로와 추가 파병 계획까지 선제적으로 밝혔다. 김수경 통일부 차관은 이날 채널A에 출연해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특수부대로 1차 파병이 이뤄진 데 이어 조만간 그 예하 부대원들이 추가 파병될 것으로 보인다”며 “방어보다 공격에 특화돼있는 부대원이기 때문에 격전지인 쿠르스크가 좀 더 (투입될 전장으로) 가능성이 있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이미 노출된 루트는 다시 활용하기 어려운 만큼 북·러는 이를 회피하기 위한 다른 통로를 개척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복수의 정보 소식통은 전했다. 똑같은 '나쁜 짓'을 저지르기 위한 비용이 높아지는 셈이다.

번스 국장의 설명대로 동맹 및 유사입장국이 경각심을 함께 높이는 효과도 있다. 당장 이번 사안의 여파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우크라이나 파병론이 다시 대두될 거란 관측이 나왔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18일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에 대해 "현재까지의 우리의 공식 입장은 확인 불가지만, 물론 이 입장은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주요국 정보기관 역시 북·러 간 동향을 보다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가능성이 커졌다.

국정원 발표 이후 외신들의 보도가 이어지고, 우크라이나 발로 관련 영상, 문서 등 증거도 다수 공개됐다. 우크라이나군 소속 전략소통·정보보안센터(SPRAVDI)는 18일(현지시간) SNS에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줄을 서서 각종 물품을 받아가는 모습의 영상을 공개했다. 다만 영상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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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군 소속 전략소통·정보보안센터( SPRAVDI )는 18일 소셜미디어 X에 “러시아 세르기옙스키 훈련장에서 새롭게 입수한 영상에는 북한군이 우크라이나로의 배치를 준비하면서 러시아 장비를 착용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며 28초짜리 영상 하나를 공개했다. spravdi 페이스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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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제재 모니터링 메커니즘, 북·러 정조준 예상



이런 가운데 지난 3월 러시아의 몽니로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위 전문가 패널이 폐지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지난 16일 출범한 '다국적 제재 모니터링 팀'(MSMT, 11개국 참여)도 북·러 간 불법 행위를 감시하는 데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외교가에서도 패널 폐지의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라도 이를 정조준하는 게 ‘순리’라고 보는 분위기가 짙다. 출범식에서 김홍균 외교부 1차관은 "러시아와의 불법적인 무기거래 등 여러 분야에서 북한의 안보리 결의 위반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북한은 당장 경계심을 드러냈다. 최선희 북한 외무상은 20일 노동신문을 통해 MSMT가 "존재 명분과 목적에 있어 철저히 불법적이고 비합법적"이라며 "가담한 나라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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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균 외교부 1차관이 1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별관 외교부에서 MSMT 출범을 발표하고 있다. 김 차관 뒤로는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 오카노 마사타카 일 외무성 사무차관을 비롯해 MSMT 참여국 주한 대사들이 서 있다. 공동취재단.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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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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