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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월)

‘흑역사’도 괜찮아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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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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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영 | 자립준비청년



18살에 보육원을 퇴소하고 자립해야 했을 때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느낌이었다. 보육원에서 17년을 지내며 오랜 시간 많은 규칙 아래 단체생활을 하다가 앞으로는 모든 것을 나 혼자 결정해야 한다는 막막함과 두려움이 매서운 파도처럼 다가왔다. 이 많은 시련을 견디기에는 나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은 배에 불과했다. 파도를 헤쳐나가기 위해 노를 두 손으로 꽉 잡았지만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짙푸른 바다 아래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자립 초기는 ‘모름’의 연속이었다. 보육원 퇴소 뒤 생활했던 회사 기숙사 우편함에서 노란색 종이를 봤을 때 그 종이가 고지서인지 몰랐다. 동료가 관리비를 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줬을 때 ‘고지서’라는 존재를 처음 알았다. 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돈을 내야 하는지 몰라 여기저기 나열된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몰랐다. 보육원 생활 할 때는 용돈을 받았던 터라 큰 숫자의 월급이 통장에 찍히니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무작정 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 억눌린 마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폭발했다.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으니 생활비 여기저기에 구멍이 생겼다. 어떤 날은 빠져나가야 할 돈을 미리 계산하지 못해 통장 잔고 300원으로 한달을 버티기도 했다.



처음 집을 구할 때도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부동산 사장님과 은행 상담원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때는 인터넷의 힘을 빌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다 찾아보고 공부한 뒤에야 힘겹게 계약할 수 있었다. 입주는 무사히 끝냈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내가 커튼의 사이즈를 잘못 재서 창문의 반도 가리지 못했다. 그렇게 그 집에서 생활하던 2년간의 아침은 매일 눈이 부셨다.



이러한 시행착오는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발생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경계하고 눈치 보기 바빴다. 혹시 보육원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걱정하며 늘 한 걸음 물러섰다.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해결하기보다는 다른 관계로 도망치거나 혼자 꼭꼭 숨어버렸다.



돌이켜 보면 자립 초기에 겪었던 모든 ‘처음’의 순간들을 홀로 고민만 했다. ‘자립이라는 망망대해 위 내가 탄 배는 잘 나아갈 수 있을까?’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고 있나?’ 하고 말이다. 더 나아가 나의 부족함과 무지함이 생존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꾐에 넘어가 사기를 당한다든가 생계를 이어갈 진로를 정하지도 못한다는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한번의 실패가 나의 삶을 결정지을 것이라 지레 겁먹고 있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어린 시절부터 쌓은 ‘흑역사’ 덕분에 혼자 해낼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아졌다. 고지서 자동이체는 물론이고 부동산 계약서도 꼼꼼히 살펴본다. 이제는 웃으면서 자립 초기의 이야기들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기도 하고, 자립을 앞둔 친구들에게 시행착오의 경험을 멘토링이나 자립 교육으로 전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많은 자립준비청년과 보호아동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우리 모두 시행착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시행착오’의 사전적 의미는 실패를 거듭하여 적용하는 일로 시행과 착오를 되풀이하다가 점차 목표에 도달해 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자립준비청년들이 마음껏 시행과 착오를 되풀이해볼 수 있는 사회일까?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자립준비청년들이 단순히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를 넘어 본인의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할 수 있기를, 과거의 나처럼 자유롭게 흑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 끝엔 자립준비청년들 앞에 찬란한 역사가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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