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25년 鮮展 입선작, 김관호의 ‘해질녘’, 이제창 ‘女’는 촬영·게재금지
한국의 첫 근대 나체화로 꼽히는 '해질녘'. 1916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김관호의 작품으로 문부성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에 뽑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신문에 게재되지 못했다. 총독부는 여인의 벗은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이 풍속을 해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동경예술대학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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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입상자 발표는 금 30일 오전10시에 하였는데, 각부 입상자의 씨명은 다음과 같으며 동 11시부터 신문 기자 일동에게 관람을 허락하였는데 정문 입구로부터 동으로 향하여 글씨와 사군자(四君子)를 진열하였고 다시 2층으로 동양화와 조각, 서양화의 순서로 진열하였는데 작품은 그다지 사람을 놀랄 만한 것이 없음이 유감이오. 제2부에 서양화중 4등상에 뽑힌 이제창(李濟昶)씨의 여자라는 나체화는 경찰의 명령으로 사진 박히는 것을 금지한 것이 보는 자의 주목을 이끌게 하였으며….’(’미전입상자발표’, 조선일보 1925년 5월31일)
총독부가 1922년 출범시킨 조선미술전람회(鮮展)는 유일한 관립 공모전이자 미술가들이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동양화와 서양화, 글씨와 사군자, 조각 분야로 이뤄진 선전에서 누드는 서양화 분야에서 출품됐는데, 거의 매년 입선작을 배출했다. 총독부는 누드화 전시는 허용했으나 사진 촬영은 제한했다. 신문,잡지에도 입선작 게재를 불허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5월 이제창의 ‘여’(女)도 당선사실은 보도됐으나 사진 촬영이나 신문 게재는 없었다.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4등)을 차지한 이제창의 여. 동경미술학교 재학중에 그린 작품이다. 사진촬영이나 신문 게재는 총독부 검열로 금지됐다.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
◇1923년 김관호의 鮮展 입선작은 게재금지
총독부의 누드화 검열은 2년전인 1923년 제2회 선전때도 있었다. 김관호의 당선작 ‘호수’가 신문 게재가 금지된 것이다. ‘김관호씨의 호수(湖水)와 원전운웅(遠田運雄)씨의 나부(裸婦)의 두 점은 나체의 부인을 모델로 하였다 하여 보이기는 하나 신문에 박어내이지는 못하게 하였더라. 이에 대하야 모 화가는 분개하여 말하되 예술의 나라에까지 경무당국자의 이해없는 권력이 미치어서는 참으로 불쾌한 일이라 하더라’(동아일보 1923년 5월11일) 1916년 동경미술학교 수석 졸업과 함께 일본 문부성 미술전람회(文展)에서 ‘해질녘’으로 당당히 입선한 김관호였지만 선전(鮮展) 당선작조차 신문에 실릴 수 없는 처지였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김관호의 '호수'. 역시 사진 촬영이나 신문 게재는 금지당했다.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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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호의 1916년 ‘문전’ 특선 소식은 매일신보(1916년10월20일)가 화가 사진까지 실으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光輝彬彬, 一幅의 그림’이란 제목 아래 ‘조선 화가의 처음 얻는 영예’란 제목아래 ‘금년의 전람회 2부 서양화에는 각 화가로부터 제출한 1546매중에서 겨우 아흔두장의 그림이 입선되고 그외에는 모두 낙선되었는데, 그중에는 다만 한 사람 조선의 청년화가 김관호의 그린 바 ‘석모’라는 서양화 한폭이 입선되었음은 조선의 청년화가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며…’
‘전람회에 진열된 김군의 그림은 동경으로부터 사진이 도착하였으나 여인의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사진으로 게재치못함’이란 단서와 함께 ‘김군이 요사이 그린 그림’이라는 풍경화가 게재됐다.
구로다 세이키(黑田 淸輝)의 1907년 작 백부용(白芙蓉).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일본 문부성이 출품한 '참고품'으로 전시됐다. 조선에 전시된 최초의 근대 나체화로 보인다. 구로다는 일본에서 나체화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역이었다.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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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조선인의 미술적 天才에 감사’
당시 마침 동경에 체류중이던 춘원 이광수가 전시회를 직접 보고 기사를 써서 보냈다. ' ‘조선인의 그림’이라는 여학생들의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려보니 대동강 석양에 목욕하는 두 여인을 화(畫)한 김관호군의 ‘日暮(해질녘)’라. 아아, 김관호군이여, 감사하노라...나는 군이 조선인을 대표하여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하였음을 다사(多謝)하노라’(‘동경잡신-문부성미술전람회기’ 3, 매일신보 1916년11월2일)
누드화 게재 금지가 조선인 작품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 일본은 당시 누드화를 배워야할 서양 근대 문명의 일부로 여겼다. 하지만 누드화 촬영이나 신문, 잡지 게재는 단속했다.
1925년 5월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김복진의 조각작품 '나체습작'이 전시회 직전 파손된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신문들은 이 사건을 사회면에 비중있게 다뤘다. 조선일보 1925년 5월3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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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부러지고 배 긁힌 김복진의 ‘나체습작’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도 이미 입선자의 발표가 있었고, 30일에는 입상자의 발표와 신문 기자의 관람이 있을 터인데, 이제 전람회로는 물론 조선 미술계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그 중대문제라 함은 이번 출품 중에 조선 사람으로는 처음 출품인 제2부 조각에 배재교보 교원 김복진씨의 조각 2점이 있었는데, 그 출품 중 한 점인 나체습작이란 여자의 나체상이 28일 오전에 이르러 왼편 팔이 상하여 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을 과실로든지 고의로든지 상하게 하였다 함은 실로 조선미술전람회가 있은 후 처음되는 일이오, 이로 인하야 전람회 안에서는 물론 일반 미술계에서는 졸지에 중대한 문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개막전의 美展에 작품破傷사건 돌발’, 조선일보 1925년5월30일)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 실린 김복진의 조각 '나체습작'. 이 작품은 전시회 직전 누군가에 의해 훼손돼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왼쪽 팔이 망가지고, 복부 등에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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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사회면(2면) 톱기사로 여러 꼭지를 다룰 만큼,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미술계 안팎에선 혹시 나체작품을 반대한 누군가가 고의로 훼손한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관전(官展)을 주최한 총독부의 관리부실도 문제삼았다.
김복진은 이에 대해 ‘일개월 이상 전심전력한 것이 전람회가 열리기도 전에 깨어졌다 함은 참 섭섭합니다. 상처는 왼팔이 떨어지고 배와 국부에 손톱자국이 있음으로 처음에는 ‘누가 고의로 한 일이 아닌가’하는 의심도 있었으나…’라고 인터뷰한 것으로 보아 처음엔 의혹을 가졌던 듯하다. 하지만 ‘내가 예술가라는 처지를 생각하는 동시에 오직 예술가의 양심을 믿는다는 생각으로 어떠한 사람의 고의가 아니라 인부의 잘못으로 생각하려 합니다’(‘예술적 양심을 신임’, 조선일보 1925년5월30일)라고 담담히 정리했다. 김복진의 또 다른 작품 ‘3년 전’은 3등에 입상했다.
김복진이 1925년 2월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소녀좌상을 만드는 과정을 취재한 조선일보 1925년 2월22일자 기사. 열네살 소녀를 모델삼아 조각을 만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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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꺾은 김관호, 6년 수감생활 김복진
김복진은 1925년 2월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소녀 좌상을 제작하는 모습이 신문에 보도됐다.
‘작년 가을 동경에서 열린 제국미술품 전람회에서 입선이 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김복진씨는 요사이 경성에 돌아와 낙산 밑에 있는 서화협회에서 목하 졸업제작에 착수중이다. 조선에서 이 같은 천재 조각가가 처음 나게 된 것은 실로 조선 미술계의 자랑이라 하겠으며 이번에는 조선 소녀의 좌상을 제작중인데, 모델로는 시내 와룡동 88번지에 사는 조봉희(14)라는 귀여운 소녀를 사용중인데 김씨는 손에 흙을 든 채로 기자를 보며 ‘아틀리에도 없이 제작을 한다 하는 것은 참으로 억지의 일이올시다. 그리고 흙도 마땅한 것이 없어서 일본에서 갖다 쓰게 되니 참으로 불편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며 조각 예술은 그림과도 달라서 조선에는 이해자가 너무나 적습니다’하며 적막한 웃음을 보였다.’(‘졸업제작에 열중한 김복진씨’, 조선일보 1925년2월22일)
재료나 모델 구하기도 어렵고 조각에 대한 몰이해도 속상했던 모양이다. 그런 김복진이 한달 넘게 애써 만든 조각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됐으니 답답했을 것이다.
1916년 10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김관호가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당선됐다는 사실을 전한 매일신보 1916년 10월20일자 기사. 당선작이 나체화라서 게재할 수없어 김군의 최근작을 싣는다면서 풍경화를 게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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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회화 분야에서 근대 최초의 누드작을 내놓으면서 충격을 안긴 예술가들의 운명은 밝지 않았다. 김관호는 1916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평양에서 풍경화 위주 작품 50점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화가로선 첫 개인전이었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호수’로 입선했으나 얼마후 붓을 꺾었다. 소설가 팔봉 김기진의 형인 김복진은 토월회 창립멤버이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KARF)과 ML당(黨)에 가담했다 1928년 체포당해 1934년까지 6년간 수감됐다. 출감 후 조선미술전람회에 ‘나부’(裸婦) ‘소년’이 특선하는 등 작품활동을 이어갔으나 마흔을 앞둔 1940년 불의의 질병으로 타계했다.
◇참고자료
김소연, 한국 근대기 나체화의 성과와 한계-제작, 전시, 검열의 구조적 고찰, 대동문화연구 제123집, 2023,9
배홍철, 검열이 예술의 제도화에 미치는 영향-한국 1920년대 여성 나체화 수용과정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석사논문, 2013.8
김영나, 한국의 미술들:개항에서 해방까지, 워크룸 프레스, 2024
안현정, 근대의 시선, 조선미술전람회, 이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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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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