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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위기 청소년들 ‘나무’ 그늘 사라지나…서울시 재위탁 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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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2일 저녁 6시께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경의선 책거리에서 ‘서울시립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의 거리상담 부스가 운영되고 있다. 고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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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저녁 6시께, 삼삼오오 모인 청소년들이 ‘틱톡’ 영상을 찍고 있던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경의선 책거리에 천막이 들어섰다. ‘이곳은 청소년 전용공간입니다’라는 펼침막과 함께 탁자 위에 젤리, 보드게임, 구급약, 모루인형 만들기 재료 등이 놓였다. 방금 도착한 햄버거 냄새가 거리로 퍼지자 춤을 추던 청소년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매주 토요일마다 이곳에서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서울시립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의 거리부스였다.



위기십대여성의 일시보호 및 긴급생활지원 등을 통해 성착취를 방지하기 위해 2013년 설립된 ‘나무’는 거리의 위기 청소년을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청소년 밀집공간인 홍대 경의선 거리에서 매주 거리상담을 진행한다.



부스에 다가온 청소년들이 호기심과 경계심을 동시에 품으며 물었다. “저도 햄버거 가져가도 돼요?”, “그냥 모루 인형만 만들고 가도 돼요?” “이용지 작성할 때 이름 말고 별명 적어도 돼요?” 모든 대답은 예스(YES)였다. ‘나무’는 청소년들에게 이름도, 나이도, 가출 여부도 먼저 묻지 않는다. 위기상황에 언제든 나무가 먼저 떠오를 수 있도록 라포(신뢰와 친밀관계가 형성된 관계)를 형성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온라인상에서 나무 활동가들이 청소년들과 함께 경의선 거리에서 ‘랜덤 플레이 댄스’(무작위로 나오는 케이팝에 맞춰 춤을 추는 놀이)를 추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문화를 저희도 같이 즐겨야 친해질 수 있는 거죠. 어느 날 갑자기 모르는 기관에서 우리 공간에 들어와 상담하겠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들이 우리한테 공간을 내어준 거니, 가서 춤이라도 춰야죠” ‘나무’의 국현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매주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는 ㄱ(17)양은 “나무 활동가들을 만나는 게 삶의 낙”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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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저녁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경의선 책거리에 설치된 ‘서울시립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의 거리상담 부스에서 청소년이 활동가와 함께 모루 인형을 만들고 있다. 고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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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업무는 거리상담에만 그치지 않는다. 서울 동작구에 있는 ‘나무’ 센터에는 카페형 상담공간과 생활공간이 마련돼 있어 여성청소년이 언제든 허기를 달랠 수도, 낮잠을 잘 수도, 몸을 씻을 수도 있다. 상담 시간을 잡지 않고도 언제든 들어와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돌봄 공백에 놓인 청소년들이 기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돌봄 부재와 가정에서 겪은 신체적, 정신적 폭력이 가출의 주된 이유예요. 그래서 평소 정서적 허기를 채울 수 없던 청소년들이 많이 와요. 오히려 밥도 안 먹고 종일 활동가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요” (홍경희 ‘나무’ 센터장)



하지만 서울시 위탁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나무’는 오는 12월31일 사업이 종료될 위기에 처해있다. 지난 9월 서울시의회에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관리 운영 재위탁’ 안건이 상정됐지만 청소년쉼터 등과 서비스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보류’됐다. 서울시는 의회에 다시 민간위탁 추진 계획서를 제출했고 오는 21일 시의회의 동의 절차가 필요하다. 재위탁 동의를 받지 못하면 2025년부터 ‘나무’는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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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나무’ 센터의 카페형 상담공간. 모든 여성청소년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다. 고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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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유일하게 ‘긴급 일시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나무’는 집에도, 쉼터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사각지대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쉼터와 목적과 기능이 다르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의 ‘2024년 청소년 통계’를 보면, 재학 중 청소년의 가출 사유로 ‘부모님과의 문제’가 전체 응답의 52%를 차지하지만, 가정 밖 청소년이 부모에게 연락하지 않고 쉼터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에 불과하다. 청소년이 보호자 연락을 거부해도 72시간 안팎으로 연락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여성가족부의 지침이다.



쉼터나 그룹홈 등에 입소하지 못한 가정 밖 청소년들은 지인의 집을 전전하거나 거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온라인으로 쉽게 성매매에 유입되거나 성착취를 조건으로 지낼 곳을 제공해주는 이른바 ‘헬퍼’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입소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안전하게’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이 이들에게 필요한 이유다. 홍경희 센터장은 “보호자 연락 절차뿐만 아니라 자해 시도 및 정신의학과 약물 복용 이력이 있는 청소년은 쉼터 입소에 어려움이 있고, 일시쉼터의 경우 월 이용 횟수 제한, 단기 및 중장기쉼터의 경우 일시적으로 이용하는 청소년들의 이용 제한이 있다”면서 “서울·경기 지역에 있는 쉼터를 전부 전전한 청소년들은 결국 거리에 있는 게 가장 편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십대여성은 성착취 등 다른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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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나무’ 센터의 생활공간(주간 드롭인센터). 주간 시간대에 여성청소년 누구나 찾아와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고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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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청소년이 도움이 필요할 때 ‘헬퍼’가 아닌 지원기관을 떠올릴 수 있도록 ‘나무’는 열려있는 공간이 더 많아야 한다고 말한다. 홍 센터장은 “위기 청소년의 경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신고나 대응 의지를 잃고 연락을 끊는 경우가 많다. 제도화되지 않고 열려있는 공간, 위기지원과 함께 일상적 돌봄을 제공하는 기관이 지역사회에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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