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명태균씨, 김건희 여사. 한겨레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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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 | 논설위원
토머스 페인이 쓴 소책자 ‘상식’(1776년)은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펴 영국 왕의 지배를 거부하는 독립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왕정이 왜 폐지돼야 하는지 논하는 대목에 이런 표현이 있다.
“왕위 계승권이 어처구니없는 것이라는 가장 유력한 자연의 증거 중 하나는 바로 자연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이 그렇게 자주 인류에게 사자 대신 당나귀를 줌으로써 왕위 계승권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유능한 왕을 사자에, 형편없는 왕을 당나귀에 비유하면서, 왕위를 세습한 자가 통치자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도 계속 권좌를 지키는 왕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한 것이다. 실제 인류 역사에서 이 같은 “악한이나 바보의 통치”가 무수히 반복됐다는 사실과 함께.
민주공화정은 그 당연한 대안이었다. 시민들이 악한이나 바보를 통치자로 선출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러나 선거 제도에도 약점은 있다. 후보의 본색을 감추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기술로 유권자를 현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 기술의 가장 큰 성공 사례로 꼽힐 만하다.
‘검사 윤석열’은 법과 정의, 공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강단 있는 원칙주의자로 ‘비쳤다’.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이들도 많았지만, 상당수가 그렇다고 믿었다. 부인 김건희씨를 둘러싼 여러 의혹도 제기됐지만,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김씨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만큼이나 믿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본색은 곧 드러났다. 선거 때 감췄던 민낯을 윤 대통령만큼 노골적이고 공세적으로 드러낸 대통령은 없었지 싶다.
검찰 독립성의 투사처럼 굴던 윤 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강력하게 검찰을 장악하고 길들였다. 검찰은 부인의 주가조작 혐의를 덮어줬고, 대통령은 자기 손으로 ‘김건희 특검법’을 두차례나 거부했다. 대통령 자신도 수사 대상이 되는 ‘채 상병 특검법’도 거부했다. 다른 사람을 먼지 털듯 수사하는 것으로 정치적 자산을 쌓더니 정작 자신과 부인은 치외법권으로 장벽을 치고 있다. ‘법치의 악한’이라고 부를 법한 행태다.
김건희 여사 역시 ‘아내의 역할’을 한참 이탈한 행보를 과감하게 연출했다. 대통령이 부인의 부적절한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유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이 제기됐는데, 최근 ‘김건희-명태균 게이트’를 통해 두터웠던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는 대선 직후 이뤄진 김영선 전 의원의 보궐선거 공천에 대해 “김건희 여사가 ‘김영선 공천은 자기 선물’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또 김 전 의원 공천을 당 공천관리위원회에 지시했다는 취지의 윤 대통령 통화 육성이 공개됐고, 명씨는 이에 대해 “지 마누라가 옆에서 ‘아니 오빠, 명 선생님이 놀라서 전화 오게끔 만들고, 오빠 대통령으로 자격이 있는 거야?’(라고 다그치자, 윤 대통령이) ‘나는 분명히 했다’고 변명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사실이라면 대통령이 부인의 지휘에 따라 불법을 저지른 게 된다. “대통령으로 자격이 있는 거야?”라고 묻고 싶은 건 국민들이다.
명씨가 윤 대통령을 ‘장님 무사’에, 김 여사를 ‘그 어깨에 올라탄 주술사’로 비유했다는 강혜경씨의 국정감사 증언을 들으며, 한탄스럽지만 현실을 반영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현실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선 토머스 페인의 비유를 가져와야 할 것 같다. 장님 무사가 아니라 당나귀 등에 올라탄 주술사.
선출된 통치자가 당나귀로 판명 났는데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마냥 지켜봐야만 한다면 그런 민주공화정은 왕정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체제다. 그래서 마련된 게 탄핵 제도다. 악한이나 바보의 통치를 견딜 수 없으면 혁명을 해야만 했던 왕정과 달리, 헌법학자들의 표현대로 ‘공분을 발산할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을 강구해둔 것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대통령 탄핵이나 조기 퇴진을 “헌정 중단”이라고 한 것은 틀린 말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헌정의 한 과정일 뿐이다.
4일 발표된 여론조사를 보면, ‘대통령 중도 하차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58.3%(오마이뉴스·KSOI), ‘탄핵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65.6%(여론조사 꽃)에 이른다. 그래도 윤 대통령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주권자의 아우성을 아예 무시한다. 왕정 시대의 당나귀 왕이나 지녔을 법한 태도다. 민주공화정에 대한 모욕이다. 공분이 쌓일 대로 쌓였다.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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