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27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산재사망대책마련 공동캠페인단’이 산재 사망사고가 많이 발생한 기업 명단 공개를 거부한 노동부를 규탄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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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섭 | 재단법인 피플 미래일터연구원장·미래일터안전보건포럼 공동대표
지난달 17일 서울행정법원은 ‘고용노동부가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 명단 공개를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한겨레 10월20일치 온라인판). 노동부는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의 이름을 공개해달라는 한 기관의 청구를 수사 및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라는 이유로 거부했었다. 재판 과정에서 노동부는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의 명단이 공개되면 해당 기업의 신용과 명예가 훼손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해당 기업은 민형사상 제재와 함께 보상 비용, 생산 차질 등 다양한 경제적 손실을 보게 되고, 해당 기업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등 이미지 손상으로 인한 피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산재 발생이 초래할 수 있는 이러한 손실은 역으로 산재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촉진하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 산재 발생기업의 ‘신용·명예 훼손’을 산재 예방을 위한 정책 도구로 활용하는 이유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법 위반으로 연간 2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업장 등을 공표해야 하는 의무를, 중대재해처벌법은 법 위반으로 중대 산업재해를 일으켜 형이 확정된 사업장을 공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각각 노동부 장관에게 부여하고 있다.
미국, 영국 등 산업안전 선진국에서는 산재 발생기업에 대한 정보를 더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미국 산업안전보건청 누리집은 중대재해뿐 아니라 부상 재해에 대해서도 해당 기업의 정보, 재해 정도, 재해 발생 경위를 신속하게 공개한다. 미국 정보공개법(FOIA)은 사고가 난 사업장에 대한 감독 결과에 대해서도 공개를 청구할 수 있도록 정한다. 이에 더해 영국에서는 법원이 사망사고에 대하여 법 위반 사실, 벌금액, 개선명령 내용 등을 해당 기업이 직접 일간지 등에 공개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
제품의 품질과 관련한 평판에 대응하는 기업의 태도는 매우 자발적이다. 판매한 제품의 품질에 문제가 생기면 기업이 스스로 제품을 수거하거나 보상해주는 경우가 흔하다. 기업의 최고 책임자가 나서서 사과하고 해당 제품을 폐기하기도 한다. 품질에 대한 평판의 손상이 민·형사적 제재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등 규제 강화와 감독관 2배 증원, 예산 4배 확대 등 자원 투입의 확충에도 불구하고 산재 감소는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안전 정책의 전형적인 후진 행태다. 기업의 자발적인 위험 통제를 촉진하는 규제와 첨단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혁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사고 발생기업에 대한 정보의 신속한 공개는 물론 사업장 감독 결과, 사고조사 자료, 산재보상 자료를 기초 데이터로 제공해야 한다.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의 신용과 명예는 숨겨서 지켜지는 게 아니다. 이미 공개해 오던 기업 명단을 숨길 일이 아니다. 산재 발생 사실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잃은 평판은 안전관리를 경영의 본질로 삼고 실천해 되찾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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