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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금)

4장만 옮겨도 다리 휘청…연탄, 사람이 일일이 나르는 사연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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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올해 67세가 된 허기복 연탄은행 대표가 연탄 지게를 등에 지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허 대표는 ″하루에 2시간만 봉사를 해도 다이어트가 따로 필요 없다″며 웃었다. 신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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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끙차.” 연탄 지게를 진 자원봉사자들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한 개에 3.5kg인 연탄 8장이 얹어지자 건장한 30대 남성 자원봉사자도 쉽사리 발을 앞으로 내딛지 못했다.

7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전원마을에서는 허기복(67) 대표 등 연탄 은행 관계자들과 자원봉사자 40여명이 함께 연탄을 날랐다. 넓은 정원을 갖춘 200여채의 고급 주택가 끝자락, 1980년대 후반 사당동 재개발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정착한 판자촌 전원마을이 봉사 대상이다. 이날 나른 연탄은 2000장으로 전원마을에 거주하는 70가구 중 이날 배달 대상이 된 6가구가 약 두 달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허 대표는 “눈이 오거나 하면 제때 공급하기 어렵다보니 두 달 치를 미리 드리는 것”이라며 “30일간 약 150~200장 가량 연탄을 소비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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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 전원마을 주민이 사용하는 연탄 보일러의 모습. 전원마을 주민 대다수가 60대 이상의 고령이라 연탄을 1년 중 7개월 가량 뗀다고 한다. 신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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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낮 온도는 14도로 제법 따뜻했다. 날이 좋아 다행이라고 인사를 건네자 연탄은행 관계자는 “오히려 조금 추운 날씨가 봉사하기는 더 좋다”고 말했다. 조금만 지나면 땀이 나기 때문이란다. 평소 8시간 이상 가방에 노트북과 20만 암페어 보조배터리, 필기도구 등을 한 몸처럼 지고 다니는 기자도 지게를 지어보았다. 연탄 단 4장을 지었을 뿐인데도 다리가 휘청거렸다. 연탄지게를 진 채 차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걸었다. 5분가량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탄을 내려놓고 나니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 대표는 “홍제동 개미마을이나 노원구 상계동 언덕을 오르고 나면 추운 겨울에도 땀이 줄줄 난다”며 “배달 업체들도 고사하는 곳들이다 보니 우리가 아니면 연탄을 땔 수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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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은행 허기복(67) 대표가 연탄지게를 지고 좁은 길목을 지나고 있다. 차가 들어가기 어려운 골목에 위치한 집들에는 직접 연탄지게로 지고 연탄 배달을 가야 한다. 신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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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연탄을 직접 나르는 또 다른 이유는 연탄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배송비는 연탄 가격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중의 연탄 가격은 1100~1500원에 달한다. 연탄은행은 자원봉사자들 덕에 배송료를 절감해 연탄 한장당 900원으로 가격을 책정하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850원으로 책정했지만, 올해는 장당 50원이 올랐다. 올해 4월 서울 북부 지역과 강원 지역 연탄 공급을 담당하던 이문동 삼천리 연탄공장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연탄 단가가 오르면서 연탄 기부량도 줄었다. 지난해 10월 말 기준으로 연탄은행의 누적 연탄 기부량이 10만장이었으나 올해는 현재까지 4만장으로 절반도 못 미치는 상황이다. 허 대표는 “내년 4월까지 300만장을 기부하는 게 목표인데 상황이 좋지 않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연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국 연탄 사용 가구 수는 7만4000여곳으로 지난 2006년 27만여 가구 이후 매년 감소 추세다. 국가에너지통계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가정용으로 사용되는 무연탄의 국내 생산량은 2016년 172만톤에서 2022년 82만톤으로 해마다 줄어왔다. 가정에서 쓰이는 무연탄 소비량도 2016년 21만톤에서 2022년 3만톤 정도로 매해 감소했다.

그러나 난방비 및 공공요금 인상, 고령층 증가 등의 이유로 서울과 대구, 충북, 제주 등의 연탄 사용 가구는 2년 전보다 증가했다. 강북 개미마을, 노원 상계3‧4동, 정릉동, 강남 구룡마을 등 1800여 가구가 연탄을 이용 중이다.

서초구 전원마을 총무인 권옥여(61)씨는 “연탄공장 사장님들은 ‘기름값도 안 나온다’며 배달을 포기한 지역인 데다 별도로 사면 가격이 부담돼서 구매할 엄두도 안 난다”며 “연탄공장이 또 하나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탄 단가가 더 오를 것 같아 걱정된다. 올 겨울은 더 춥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신혜연 기자 shin.hye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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