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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수)

트럼프 승리 뒤 미국서 주목받는 ‘4B’…한국서는 ‘운동 넘어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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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국 엔비시(NBC) 등은 트럼프 당선 이후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한국의 4B 운동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뉴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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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재선으로 미국 여성들 사이에서 한국의 ‘4B 운동’에 대한 관심 촉발”-엔비시(NBC)



“트럼프의 승리 이후 일부 여성들은 4B 운동을 고려”-시엔엔(CNN)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하자 이에 좌절한 젊은 여성들이 한국의 ‘4B운동’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주요 외신 보도가 이어졌다. 실제 엑스(X·옛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4B’ 등 관련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4B운동이란 결혼·출산·연애·섹스를 ‘거부’한다는 뜻으로, 4비(非)는 비섹스·비연애·비혼·비출산을 일컫는다. 급작스럽게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4B운동에 대해 그간 한국 언론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다만 2019년 한겨레의 젠더 매체 슬랩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대 80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66.8%(여성 69.3%, 남성 64.4%)가 4B운동을 알고 있었다. 앞선 세대가 연애·섹스·결혼·출산을 생애주기에 따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상황에 따라 거부 가능하다는 선언은 지금의 30대 이하 세대에겐 익숙한 움직임이었던 셈이다. 4B운동에 참여한 여성과 이들을 연구한 논문 등을 중심으로 4B운동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한겨레

미국 엔비시(NBC) 등은 트럼프 당선 이후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한국의 4B 운동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뉴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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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3살 여성인 대학생 이아무개씨는 중학교 졸업 이후 연애를 한 적이 없다. 중학생이었던 시기 남학생들로부터 성희롱을 심하게 당한 탓에 남성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고, 인터넷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했던 영향도 컸다고 했다. 그가 중학생이었던 2015년 무렵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 페미니즘 리부트(reboot, 재시동) 현상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2016년 5월 “평소 여자들한테 무시를 당해 범행했다”는 30대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을 살해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온라인에서 일기 시작한 피해자 추모 논의는 ‘강남역 10번출구 추모집회’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많은 여성에게 피해자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졌고, 성차별적 현실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2017년 9월엔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를 촉구하는 글이 청와대 누리집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와 23만여명의 지지를 받았다. 2018년엔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국가와 사회가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불신이 커졌다. 사회가 요구해온 여성상과 꾸밈 노동에서 벗어나자는 ‘탈코르셋 운동’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사회에서 승인해주는 ‘여성성’에 대한 비판적 점검은 그간 의무로 여겨지던 결혼·출산을 하지 않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불법촬영과 교제폭력 등 지금도 해결이 되고 있지 못한 문제적 상황이 더해지면서 비연애·비섹스까지 아우른 4B운동이 등장한다.



4B운동에 참여한 30살 여성 이아무개(프리랜서)씨는 “남성들과 연애를 경험 해보니 여성을 대하는 태도, 특히 성관계를 함께 하더라도 임신을 비롯해 여성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훨씬 컸다. 연애를 이어가 결혼을 한다 해도 (앞선 세대) 여성의 삶을 그려보면 (이런 삶의 궤적이) 굳이 필요한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 2020년 4B실천을 결정한 수도권 지역 20~30대 비장애인 여성들에 대한 심층 면접을 기반으로 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4B 여성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연구’(박진솔·2022년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4B는 “개인적인 수행을 통해 자신의 안전과 생존을 지키는 전략임과 동시에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를 정면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운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4B를 선택하는 건 안전에 대한 위협, 고용과 임금차별, 가부장적 이성애 중심 결혼 문화 등 불평등한 젠더 권력이 야기한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애초 4B운동은 이른바 ‘래디컬’(급진적) 페미니즘 진영에서 논의가 시작됐으나 이를 실천하는 여성들의 생각은 다양했고 운동이 대중화되면서 별개의 페미니즘 운동이자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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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가디언이 트럼프 승리 뒤 미국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4B 운동에 나서고 있다고 보도한 내용. 뉴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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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계기로 미국의 여성들이 4B운동에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영국 가디언은 7일 “트럼프가 매노스피어(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성들이 운영하는 블로그 및 웹사이트)의 주요 인사들을 끌어 안았고 이는 젊은 남성들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며 “젊은 여성들에겐 트럼프에 표를 던지는 건, 페미니즘 반대투표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국제 비영리 단체인 전략대화연구소(ISD)가 8일 공개한 자료를 보면 미국 대선 직후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나의 몸, 나의 선택’(My body, my choice)을 조롱하는 ‘너의 몸, 나의 선택’(your body, my choice), ‘주방으로 돌아가’(get back to the kitchen) 같은 공격과 차별 표현이 급증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의 승리로 매노스피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여성의 권리를 공격하는 행보를 더 강화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미국에서 임신중지권은 1973년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에 의해 헌법상 권리로 보장받아 왔으나 트럼프 행정부 시절 보수 우위로 재편된 연방대법원은 2022년 이 판결을 폐기하고 각 주가 자체 입법을 통해 임신중지 문제를 결정하도록 했다. 그 뒤 공화당이 집권한 주에선 임신 초기부터 중지를 금지하는 법들을 만들었다.



애리조나 주립대의 브린 파스 교수(여성과 젠더학)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젊은 여성들이 출산을 스스로 통제할 권리가 안전하다고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권리 회복을 주장할 새로운 방법(4B운동)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남성의 욕망과 환상을 수용해야 하는 사적 관계에서의 부담, 혐오 표현 증가 등 광범위한 문제에 여성들이 직면해 있고, 이런 지점에서 심각한 충돌로 인해 여성이 전통적인 성 역할을 따르기를 거부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한국에서 4B를 외치는 여성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운동이 시들해진 것 아니냐는 물음에 30살 여성 이씨는 이렇게 답했다. “예전엔 온라인에서 4B 구호를 외쳤는데, 지금은 이게 운동이라기보단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출산율도 떨어졌고, 결혼에 대해서도 여러 설문조사에서 ‘굳이 해야 하느냐’고 응답하는 여성들이 많으니까요.”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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