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4 (목)

이슈 미술의 세계

꽃으로 총을 꾸짖는 걸까, 천경자의 마법같은 붓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천경자 화백이 1972년 베트남 전쟁 현장에서 스케치해 그린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 노형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적을 죽이려는 전쟁의 한 순간을 그렸다. 그런데 살기 등등하지 않고, 싱그럽고 아름답다.



한국 채색화의 전설이 된 대가 천경자(1924~2015)의 붓질은 마법을 부린다. 1972년 베트남전쟁 현장을 종군화가로 찾아가 그린 가로 185㎝, 세로 284㎝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은 오묘하다. 적군을 죽이고 전진하려는 국군의 밀림 속 작전을 그렸지만, 열대나무 꽃과 잎의 환상적 색감 속에 숨은 병사의 철모와 총, 장갑차와 치누크 헬기는 색면의 윤기를 더해주는 오브제 소품일 뿐이다. 전쟁화라고 하지만, 되려 대자연 속에서 전쟁의 덧없음을 예술의 힘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됐다. 이는 천 화백의 탄생 100돌을 맞아 지난 8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전(17일까지)에 대표작으로 출품됐다. 40년 넘게 국방부 청사에 걸려있다가 처음 대중 앞에 내보였다.



한겨레

천경자 화백의 제자였던 이숙자 작가의 채색화 ‘캠퍼스 훈련생’(1982). 80년대 초 대학에 출강했던 작가가 교련복을 입고 군사 훈련을 받는 재학생들을 보고 감흥을 느껴 그린 이 작품은 당대 강퍅했던 시대상을 핍진하게 담았다. 노형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시회에는 천 화백과 동시대를 산 여성 작가 22명의 작품과 자료도 내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시대적 배경과 함께 살펴보고, 한국화·동양화의 관습적 구분을 초월하고자 했던 그의 현대적 정신이 어떻게 미술계와 후대에 영향을 줬는지 조명하는 것이 취지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인 ‘조부상’, 1950년대 초 작품 ‘옷감집 나들이’, 뱀을 주제로 한 ‘사군도’(1969), 1978년 서울 현대화랑 개인전 출품작 ‘초원’(1973) 등 천 화백 작품 9점을 비롯해, 전통 춤의 형상으로 시대적 격변의 양상을 표현한 장상의의 ‘다시래기’(1988), 4·19혁명 희생자 넋을 위로한 문은희의 ‘무제(4·19혁명)’, 군사독재 시기 교련 수업을 주제로 한 이숙자의 ‘캠퍼스 훈련생’(1982), 조선미술전람회 최다 수상자였으나 후대 작가로서의 존재가 잊혀졌던 정찬영의 ‘공작도’(1937) 등 86점이 나왔다.



이 전시회 말고도 올가을 주요 미술관과 화랑에서는 묻혔던 여성 작가의 재조명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천 화백만 해도 서울시립미술관 기념전 말고도 그의 고향 전남 고흥에서 개인 소장 작품들을 대여한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찬란한 전설, 천경자’(12월31일까지)가 막을 올렸다. 고흥분청문화박물관과 고흥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이번 기획전에는 작가가 나온 고흥공립보통학교 3년 선배로 기록된 임길례를 모델로 그린 ‘길례언니’ 연작 중 ‘길례언니 Ⅱ’, 여동생 ‘옥희’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 ‘여인 스케치’, 1970년대 말 대표작 ‘탱고’ 등 주요 작품과 더불어 1956년 국전에 출품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120호 크기 ‘제주도 풍경’,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1969년 늦가을∼1970년 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유화 중 ‘누드’ 등 그동안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나와 주목된다. 박경리 작가 등 지인들이 보낸 편지들과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삽화 등 아카이브 자료들도 선보였다.



한겨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기획전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에 나온 이불 작가의 설치 조형물 ‘아마릴리스’(1999). 그 뒤로 중국 작가 통웬민의 단채널 영상물 ‘플리킹’(2022)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지난 9월부터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전을 열어 1960년대 이후 11개 나라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처음 한자리에 조망하는 기획을 내보이고 있다. 아시아 주요 여성 미술가 60여명(팀)의 작품 160여점을 신체성의 관점에서 6갈래 섹션으로 나눠 펼쳤다. 몸에 새겨진 역사, 섹슈얼리티, 신화·여신, 퍼포먼스 등의 맥락에서 한국, 일본, 중국, 동남아, 인도 등지 작가들의 영상, 그림, 조각, 설치 작품 등을 내보이고 있다.



최근 영국 테이트모던 전시로 주목받은 이미래 작가는 성에 대한 잔혹한 표현을 구사한 김언희 시인의 ‘오지게, 오지게’의 한 구절을 작품으로 삼아 여성의 욕망을 풀어냈고, 필리핀 여성주의 작가 그룹 카시불란 소속 작가 아그네스 아렐라노의 ‘풍요의 사체’는 제왕절개 경험에 기반해 출산의 고통과 파괴가 창조로 이어지는 자국 신화를 여인의 배를 가른 영상으로 보여준다. 오줌에 소금을 섞어 끓인 결정체를 이용한 장지아 작가의 조각 ‘픽세이션 박스’와 기계와 남녀인간, 동식물의 경계와 영역이 한몸에 엉켜든 복합적인 유기체의 형상을 상상해 만든 이불 작가의 설치 조형물 ‘아마릴리스’(1999) 등이 눈에 들어온다. 동시대 아시아 여성 작가들의 다기한 문제 의식을 현장 작업 중심으로 처음 소개한 뜻깊은 작품 마당이다. 다만 한정된 공간에 지나치게 많은 작품들이 병렬식으로 배치돼 주목도를 떨어뜨리고 큐레이팅의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단점들도 여실하게 보인다.



한겨레

국내 리얼리즘 화단의 여성주의 작가 김인순(83)씨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태몽 09-5’(2009). 노형석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에서 ‘일어서는 삶’이란 제목으로 열리고 있는 국내 리얼리즘 화단의 여성주의 작가 김인순(83)씨의 기증 컬렉션전(내년 2월23일까지)도 지나칠 수 없다. 2020년 기증한 작가 작품 96점과 1980~1990년대 여성 미술 운동을 벌였던 여성미술연구회, 그림패 둥지, 노동미술위원회 등이 공동으로 만든 걸개그림과 아카이브가 나왔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태몽 09-5’(2009)이 주목되는 작품이다. 오방색 무지개빛이 뻗쳐나가는 하늘 아래 야생화와 풀이 우거진 벌판에서 알몸의 남녀들이 생명력을 발산하며 해방의 춤을 추고 있는 이상세계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렸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지금 가장 핫한 뉴스, 빠르게 확인하세요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