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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목)

여론조사의 위기와 ‘정치 브로커’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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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6일 오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이 커진 가운데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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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일 | 시사평론가



1936년 이전까지 가장 권위 있던 여론조사 기관은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라는 잡지사였다. 이 기관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미국 대선의 승자를 정확하게 예측해 권위를 인정받았다. 1936년 미국 대선이 시작되면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전화번호부, 잡지 정기구독자, 자동차 등록 명부, 사교클럽 인명부 등에서 임의로 표본을 뽑아 1000만명에게 우편엽서를 발송했고 236만장의 답변을 받았다. 그 결과 공화당의 앨프리드 랜던 후보가 57%를 얻어 재선에 도전하는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현직 대통령(43% 예상)을 누르고 당선될 것으로 예측했다.



반면 조지 갤럽이 설립한 여론조사 회사 갤럽은 5만명을 선정해 그중 1500명으로부터 답을 받았다. 갤럽은 최대한 다양한 계층의 유권자들이 포함될 수 있도록 여론조사 용지를 돌렸고 루스벨트가 56% 지지율로 당선될 것이라 예측했다. 236만명 대 1500명. 전수조사와 표본조사의 대결이었다. 과학적 방식으로 표본을 추출한 갤럽에 승리가 돌아갔다. 루스벨트는 60.8% 득표율로 531명 선거인단 중 523명을 확보했고 랜던은 36.5% 득표율로 단 8명의 선거인단만 확보했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왜 예측에 실패한 것일까. 당시 저소득층은 민주당, 고소득층은 공화당을 선호했다. 잡지를 구독하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중산층 이상이었으며 전화와 자동차가 있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랜던을 지지한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설문조사 응답에 참여했다.



올해 미 대선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상당수의 여론조사 업체들은 초박빙을 예상했고 일부는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의 승리를 점쳤으나 결과는 538명 선거인단 중 312명을 확보한 트럼프의 압승이었다. 문제는 대선 기준 세번 연속 여론조사 예측이 실패했다는 점이다.



2016년 대선엔 거의 모든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이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예측했으나 경합주를 석권한 트럼프가 30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여유 있게 승리했다. 당시 힐러리 후보는 전국 단위에서는 280만표를 더 얻었다. 2020년 대선 때는 대부분 바이든 후보의 당선을 맞췄다. 문제는 정확도였다. 바이든이 전국 득표에서 8.4%포인트가량 앞설 것으로 예상됐으나 실제는 4.5%포인트 차이였다. 2020년 여론조사는 3.9%포인트 오차를 기록해 그 폭이 40년 만에 가장 컸다.



올해 미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은 교육수준에 따라 지지하는 후보가 극명하게 갈렸다는 점이다. 중서부에 거주하는 저소득 백인은 상대적으로 트럼프를 더 지지했으며 대서양과 태평양에 인접한 대도시에 거주하는 대학 졸업자들은 해리스를 더 많이 지지했다. 문제는 대졸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여론조사에 응답을 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민주당 우세주인 뉴저지주에서 해리스는 20%포인트 차이로 승리할 것으로 예측됐는데 실제론 겨우 5.5%포인트 차이였다.



1936년 대선으로 돌아가자. 당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중산층과 교육수준이 높은 공화당 지지자들을 과대 집계했다가 처참한 실패를 했다. 2024년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의사표현과 미디어 활용에 능한 대도시의 대학 졸업자들이 과다 대표됐다는 점에서 그때와 매우 유사하다. 물론 여론조사 업체들도 ‘샤이 트럼프’ 오류를 극복하려 애써왔다. 하지만 전화면접 조사 때 전화를 받을 수 없는 100만명 이상의 트럭 운전자,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며 퇴근 뒤 맥주를 마시는 것이 낙인 농장주 등 트럼프 지지자들을 여론조사에 제대로 반영했는지 의문이다.



미국 사회는 최근 몇년 사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젊은 남성들과 유색인종이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다 공화당으로 돌아서는 움직임이 발생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교육수준별, 인종별, 지역별, 성별 지지 패턴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렇다고 새로운 방법론이 완전히 과거 방법론을 대체한 상황은 아니다.



70여년을 금과옥조로 여겨졌던 과학적 여론조사 방법론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의 실패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미국에 비해 단순한 선거제도와 좁은 땅덩이로 인해 아직은 예측 정확도가 높은 편이지만 오류가 빈번해지고 있다. 오히려 작심하고 여론조작을 하려는 정치 브로커들이 늘고 있다. 새로운 규범이 모색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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