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탈출 아니라 빈곤 고착일 때
쪽방촌 비즈니스는 돈을 번다
빈곤과 시혜의 중독을 퍼뜨려
표를 얻는 빈곤 정치 어른거린다
옛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을 주도한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이 미 국무장관 베이커에게 했던 말로, 베스트셀러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빵 개수를 늘리기보다 똑같은 빵만 받으면 된다는 ‘이상한’ 평등주의에 빠진 국민을 상대로 개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소연한 얘기였다.
그렇다면 러시아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이념만이 아니다. 국민에게 자립의 힘과 기회를 박탈한 결과였다.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제시한 뒤 희망 고문을 통해 빈곤을 고착시키고, 결국 자립할 능력을 잃은 국민에게 각종 복지로 둔갑시킨 시혜성 포퓰리즘으로 중독시키는 방식이다. 고기를 잡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고 고기만 나눠주면서 사람을 길들이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시도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하나같이 평등과 분배의 가치를 강조하는 당의정(糖衣錠)의 형태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 끝난 전남 영광군수 재보궐 선거를 기억할 것이다. 조국혁신당 후보는 “당선되면 전 군민에게 행복지원금 12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시동을 걸자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까지 가세해 “주민들에게 1인당 연간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기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런 노골적 매표는 본 적이 없다. 영광군 인구는 5만명 수준, 대략 연간 500억원 이상 필요하다. 돈을 어디서 구할 것이냐는 지적에 양당 모두 영광군에 위치한 한빛 원전에서 나오는 ‘지역자원 시설세’를 쓰겠다고 했다.
‘탈원전 정당’들이 유권자에게 뿌릴 돈은 원전에서 구하는 발상도 놀라웠다. 미래 경쟁력은 외면한 채 현금 살포 잔치를 벌인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가난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 탈출이 아닌 빈곤 고착화로 돈을 버는 게 ‘빈곤 비즈니스’라고 한다”
몇 년 전 ‘쪽방촌 심층 르포’로 최은희 여기자상을 받은 기자의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기자는 서울역 서울스퀘어 뒤, 종로 귀금속 상가 거리 뒤, 영등포역 옆 등의 쪽방촌을 파헤쳤다. 1.25평짜리 쪽방의 월세는 25만원, 평당 가격으로 환산하면 40평짜리가 월세 1000만원 가깝다. 웬만한 서울 강남의 월세보다 비싸다. 그런데도 쪽방엔 보일러도, 화장실도 없다. 이 쪽방의 주인들은 강남 초고가 아파트 주민이었다. 기자가 등기부 등본 260여 통을 일일이 떼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쪽방촌 주인은 쪽방촌에 중독된 이들을 상대로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었다.
지난 정부의 한 실세는 “집 없는 사람이 많아야 진보가 집권한다’는 내용을 담은 책을 쓰기도 했다. 그 책에는 빈곤 중독의 마수가 어른거린다. 기자가 2006년 인도 특파원 시절 본 한 주지사 선거에선 ‘온 주민에게 컬러 TV를 주겠다’는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주민 10%에게만 TV를 지급했다. 이후 다음 선거에 출마하며 내세운 공약이 “또 뽑아주면 반드시 모두에게 주겠다”였다.
영광 군수의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었으면 한다. 유권자도 용인해 주기를 바란다. 어찌 성장한 나라인데, 빈곤 비지니스인가. 무능, 부패보다 더 무서운 게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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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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