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은 우리를 어디까지 멀고 깊이 데려갈 수 있나
가상현실 이용해 잊혀진 역사와 기억 되살려
권하윤 대만 소수민족과 일본 인류학자 우정 담고
김진아 ‘몽키하우스’ 등 미군 위안부 3부작
“VR 보는 것을 넘어 타인과의 경험 유도”
권하윤이 가상현실(VR) 기술을 이용해 만든 ‘옥산의 수호자들’의 한 장면.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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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VR) 헤드셋을 쓰면 눈 앞이 캄캄해진다. 암전. 머리를 누르는 헤드셋의 묵직한 무게감은 곧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잊혀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3D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대만의 옥산(玉山) 풍경이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다양한 동식물과 원시림이 보존된 천혜의 보고다. 20세기 초 일본이 대만을 점령했던 시기, 일본 문화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는 대만의 소수민족 문화를 연구·기록하기 위해 옥산을 찾았다. 눈 앞에 나타나는 천산갑, 다람쥐, 부엉이, 나비의 뒤를 따라 옥산의 숲을 헤치고 나가면서 관객은 모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대만 고산지대 원주민 부눈족의 족장 아지만 씨킹과 모리가 나눈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VR 인터페이스인 대나무등을 반딧불이의 안내에 따라 산의 절벽 위에 비추면 일본 군대에 맞선 대만 원주민들의 싸움,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가족의 원수를 갚고자 했던 부눈족장이 옥산을 탐사하던 모리를 닷새 동안 추격했던 이야기가 그림자극으로 펼쳐진다. 부눈족장은 비무장 상태로 열정적으로 옥산을 탐사했던 우시노스케의 진심을 알게 되고 국가적 적대관계를 넘어선 우정을 쌓는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올해의 작가상 2024’에서 볼 수 있는 권하윤의 ‘옥산의 수호자들’(2024)이다.
권하윤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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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이 우리의 경험을 어디까지 확장하고, 타인에게 어디까지 깊이 공감하게 할 수 있을까.
‘옥산의 수호자들’은 문자가 없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부눈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기록 없이 설화로만 남아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리가 남긴 사진과 지도, 메모, 모리가 18년간 대만에서의 연구를 접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남겼던 작별인사를 토대로 재구성한다. 옥산의 동식물과 풍경은 조사와 고증을 통해 재현했다.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의 행위다. VR 속 이야기는 관람객의 몸짓에 따라 진행되는데, 처음에 관람객은 안내에 따라 숲 속을 탐험하는 수동적 행위자가 된다. 하지만 작품의 말미 무기를 내려놓은 부눈족과 모리가 함께 손을 맞잡고 둥근 원형을 그릴 때, 거기엔 관람객을 위한 자리도 마련돼 있다. 관람객이 원형의 빈자리를 채웠을 때 이야기는 비로소 완성되며 관람객은 부눈족과 모리의 서사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한다. 또한 관객이 대나무등을 들고 걷거나 손짓하는 행위는 주변에 설치된 벽에 비춰져 그림자극이 된다.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관객은 현실 세계 속에선 그림자극 속 등장인물이 된다.
권하윤 ‘489년’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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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하윤은 잊혀진 역사적 기억이나, 갈 수 없는 공간을 재현하는 수단으로 일찌감치 VR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어왔다.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에선 권하윤이 처음으로 VR을 이용해 만든 작품 ‘489년’(2016)도 함께 볼 수 있다. 남북한 군사접경지대인 비무장지대(DMZ)에서 근무했던 군인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권하윤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생생한 감정과 제가 가보지 못한 곳을 표현하기 위해 공간적 성찰이 필요한 매체가 필요했다. 증언자의 주관적 시점을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처음 VR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관객은 ‘지뢰’로 상징되는 생사를 오가는 아슬함 속에 수색 근무를 하는 군인의 감정과 ‘꽃’으로 상징되는 DMZ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VR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선 VR이 아닌 영상 버전으로 감상할 수 있다.
김진아의 ‘아메리칸 타운’의 한 장면. 사진출처 ginakimfilm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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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의 ‘소요산’의 한 장면. ginakimfilm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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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순간이동’ 전시(내년 2월16일까지)에서는 VR, 게임, 증강현실(AR) 등을 활용한 한국과 캐나다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선 김진아의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볼 수 있다. 1992년 벌어진 ‘윤금이 피살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동두천’(2017), 미군 성병관리를 위해 성병에 걸린 위안부들을 강제수용했던 낙검자 수용소인 ‘몽키하우스’를 배경으로 만든 ‘소요산’(2021), 군산에 조성됐던 미군기지촌을 배경으로 한 ‘아메리칸 타운’(2023)을 VR로 선보인다. 김진아는 황량한 폐허가 돼 철거될 위기에 처한 낙검자수용소와 재개발로 사라진 아메리카 타운의 풍경을 기록하고 그곳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관람객들이 위안부들의 그곳에서 보냈던 일상과 감정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김진아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VR은 보지 않고 체험하게 한다. 타자와 완전히 공감하는 경험을 유도하는 매체”라고 말했다.
김지연 미술비평가는 “가상현실을 통해 평소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을 겪어 보는 것이 타인의 관점과 사고, 감정을 이해하는 ‘사회적 조망수용능력’을 키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작품 감상은 개인적인 기억이 되어 몸에 새겨지는 동시에, 우리가 좁고 왜곡된 시야를 뛰어넘어 타인의 세계에 도달하도록 만든다”라고 말했다.
‘올해의 작가상 2024’엔 권하윤, 양정욱, 윤지영, 제인 진 카이젠이 후원작가로 선정돼 네 작가의 신작과 구작들을 함께 볼 수 있다. 최종 수상 작가는 내년 2월에 발표된다. 전시는 내년 3월23일까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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