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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저기요 하이브씨, 짓밟은 건 ‘팬들의 마음’입니다 [‘아이돌 덕질’ 제 맘이잖아요?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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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누군가 입덕 계기를 물어보면 ‘열심히 해서’라고 합니다. “그렇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정도면 입덕까지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덕질은 어떻게, 얼마나 해야 진짜배기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요? 두 반응의 사이에서 “아이돌 팬은 이럴 것”이라는 묘한 편견을 마주합니다. 그것은 해묵은 ‘OO녀’ 프레임, 아이돌 팬은 ‘빠순이’라는 편견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덕질에 쏟는 시간이나 기력을 생각하면 저는 ‘라이트 팬’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팬도 있어요!’ 혹은 ‘모든 팬이 다 빠순이인 건 아니거든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더 덕질에 진심인 팬들을 보며 “누군가의 취미에 대한 평가는 정중히 사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 덕질은 제 덕질입니다. 덕질, 그건 제 맘이잖아요?

경향신문의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이 기록해 갈 ‘아이돌 덕질 이야기’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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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좋아하는 아이돌이 생겼다’라고 말하면 모두 그룹명을 물어봅니다. 그룹명을 말하고 나면 열에 아홉에겐 이런 답변이 돌아옵니다. “그룹명이 ‘벤허’야?” 저는 친절한 미소로 대답하죠. “아니, ‘벤허’가 아니라 ‘배너(VANNER)’ 라고…!(울먹)”

[‘아이돌 덕질’ 제 맘이잖아요?①] ‘빠순이’ 하나로 퉁쳐지는 ‘아이돌 팬’, 근데 저는 라이트 팬인데요

‘열심히 하려는 마음’을 좋아합니다


아직은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성장 중인 한 아이돌을 좋아합니다. 아이돌에 전혀 관심이 없던 제가 배너를 처음 알게 된 건 ‘아이돌을 좋아하는 친구들’ 덕분이었어요. 10대 후반부터 30대가 된 지금까지, 쉼 없이 ‘덕질’을 해온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서 한 친구가 제게 ‘피크타임’ 이라는 프로그램의 클립 영상을 공유해 줬습니다. 사실 단톡방에 아이돌 영상이 올라와도 거의 넘겨버리는데요. 그날은 평소와 다른 곳으로 출근해야 하는 날이어서 졸면 안 되니까, 어쩐지 섬네일에 눈길이 가서 영상을 재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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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피크타임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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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랐습니다. 이런 아이돌이 있는 줄 몰랐거든요. 당시 4년차 아이돌이었던 배너는 그 영상에서 자신들을 ‘알바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표현 그대로 모든 멤버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리더 태환과 혜성은 떡볶이 프랜차이즈에서, 영광은 영화관 CGV에서, 곤은 카페 이디야에서, 성국(당시에는 아시안)은 패스트푸드점 롯데리아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영상에서 “팬덤이 작다 보니까 알아보시는 분은 없었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들을 보며 살짝 속상했고, “생활비, 교통비, 식비 정도만 있어도 사랑하는 무대를 할 수 있고,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지속할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아이돌을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쩐지 숙연해졌습니다. ‘노력했다는 말을 하려면… 저 정도는 해야겠구나’라는 반성을 할 때쯤 무대가 시작되었는데요. 아이돌에 관심 없던 제가 ‘입덕’ 할 정도로 멋진 무대였습니다. 시원시원한 음색이, 알바를 하면서도 본업은 놓지 않았다는 말을 증명하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안무가, 무엇보다도 무대가 좋다는 그들의 말이 진짜여서, 그날 ‘배너’에 입덕하는데 단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배너의 뭐가 좋은 건데?”라는 질문을 받으면 “열심히 해서 좋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그들의 실력이 좋아서, 무대를 좋아한다는 진심이 보여서’라는 말도 덧붙여야겠지만, 정말로 제게 중요했던 건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제겐 그 마음이 가장 멋있었어요. 그 마음은, 변할 수는 있어도 결코 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 마음이지요.

사실 그 날은 제게도 꽤 중요한 날이어서, 조금 더 ‘노오력’에 과몰입했는지도 모릅니다. 한국기자상을 수상하게 되어 시상식에 가던 길이었거든요. 자신의 앨범들이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본업을 지키기 위해 아르바이트까지 뛰었다는 아이돌을 생각하며 ‘내가 얼마나 잘했다고 이런 상을 받나’라는 생각도 조금 했습니다. 큰 상을 받게 되어서 감사했지만, 저는 많은 것들이 갖추어진 상황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거든요. 역시 그 정도로 본업에 ‘노오력’ 해 본 적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먼곳에서 ‘배너’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모든 팬에게는 ‘같은 마음’ 이 있다


‘입덕 계기’를 구구절절 설명한 건, 모든 팬에게 ‘같은 마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섭니다. ‘1000명의 팬이 있다면 1000개의 덕질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팬들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도 있도 생각합니다. 바로 ‘아이돌을 응원하는 마음’입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어떤 대상’을 응원하는 사람들, 그들이 ‘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난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민형배 의원이 공개한 ‘하이브’의 ‘위클리 음악 산업 리포트’를 보고 정말 씁쓸했습니다. 사실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업계 동향 파악을 위해 만들었다는 문서에는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등 소위 3대 기획사에 대한 힐난과 함께 중소 기획사 소속 아이돌과 관련한 외모 품평, 바이럴 논란, 사생활에 대한 악담, 원색적인 비난 등이 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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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형배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하이브의 업계 동향 자료. 유튜브 ‘NATV 국회방송’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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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기획사는 ‘아이돌 산업에 기반한 기업으로서의 회사’로서의 역할과 ‘아티스트를 관리하는 소속사’로서의 역할에 모두 충실할 것을 요구받곤 합니다. 사실 소속사에 대한 팬들의 불만은 대개 두 가지 역할에 대한 ‘줄타기’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죠. ‘좋은 스케줄을 만들어 오라’는 요구와 ‘스케쥴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아티스트를 쉬게 해달라’는 요구가 함께 하듯이요.

이번 하이브의 ‘내부 보고서’ 공개 사건은 그런 종류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보고서에 담긴 내용은 ‘기업’의 것이라고 보기에 너무나 원색적이었고, ‘소속사’의 것이라고 보기엔 아티스트에 대한 존중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진한 중소의 냄새’, ‘페미코인 타려다가 팀킬한다’, ‘못생긴 나이에 우루루 데뷔’, ‘어설픈 안무’, ‘한녀에게 꾸준히 먹힌다’ 등과 같은 단어와 문장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하는 걸까요.

[스포츠경향] “그 팬덤, 바이럴, 여초 불가촉” 하이브 임원용 ‘주간보고서’ 전략

[스포츠경향]하이브 임원용 ‘보고서’ 일파만파 업계 파장···‘표명’일까 ‘전달’일까

저는 K-POP 산업에 종사하는 회사의 문건이 아니라, K-POP이라는 산업을 멸시하는 회사의 문건이라 느꼈습니다. 대부분의 소속사는 ‘사이버 렉카’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던데, 기업 내부의 문건이 ‘사이버 렉카’들의 발언 수준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문장 하나하나가 다른 소속사와 아티스트, 그리고 다른 아이돌을 응원하는 팬들까지 얕잡아보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투였지요. 그들의 노동에 어떤 노력이 담겼는지도 모르고, 팬들이 그 노력을 어떤 마음으로 지지하는지도 모르면서요.

어디서 많이 본 ‘여성혐오’


아이돌을 단순히 재화로 보는 시선도 불쾌했지만, 정말로 속상했던 이유는 결국 그 내용이 ‘누군가의 마음’을 짓밟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군가는 다른 소속사와, 아티스트가 될 수 있겠지만, 오늘 저는 ‘팬들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K-POP 아이돌 산업은 ‘팬덤’을 기반으로 움직입니다. 하이브는 문건이 공개돼 논란이 일자 “문서에 거론되어 피해와 상처를 입게 된 외부 아티스트 분들께 정중하게 공식적으로 사과드린다. 각 소속사에 별도로 연락드려 직접 사과드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회사로 인해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는 하이브 뮤직그룹의 모든 아티스트 분들께도 진심을 다해 공식 사과를 전하고 있다”는 말도 함께 전하면서요. 그런데 짓밟힌 것이 K-POP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당사자들의 마음뿐일까요.

그들이 정말로 짓밟은 건 ‘그 문건에 언급된 아이돌을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 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편지로 소통하지 않는 시대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쓴 팬레터를 보내는,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굳이 앨범을 사는, ‘시간 안 아까우냐, 생산적인 일을 해라’ 라는 잔소리에도 굳이 어떤 가수를 응원하기 위해 ‘공방(음악 프로그램의 공개방송)’을 뛰는, 아이돌을 응원하며 울고 웃었던 수 많은 팬들의 마음이요. 그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K-POP을 만든 것일 텐데요. 어쩌면 그 마음들의 가장 큰 수혜자는 엔터사 최초로 대기업 집단이 된 하이브일 겁니다. 그런 하이브가 아이돌 산업은 ‘팬덤 없이 클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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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 내 임원들에게 보고된 ‘음악산업리포트’ 원본 일부. 제보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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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사 최초 ‘대기업’의 ‘위클리 음악산업 리포트’를 보며 몇십년이 지나도록 ‘빠순이’라는 멸칭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10대 20대 여성 팬들이 대다수인 팬덤은 ‘한녀’, ‘옹졸하고 히스테릭한 고인물 팬덤’으로 낮잡아보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응원을 ‘페미코인’으로 치환하는, 급기야 아티스트까지도 ‘좀 놀랍게 아무도 안 예쁨’이라 얕잡아 볼 수 있는 ‘여성혐오적 시선’ 그 자체가 K-POP 산업의 얼굴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요. 어딘가에서 많이 본 ‘여성혐오’가 여성 소비자가 대다수인 K-POP산업에서도 굳건하다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모쪼록 팬덤을 소비자 정도로만 대우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아름 기자 areumlee@khan.kr



Q: 여러분도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으신가요? 저처럼 아이돌을 좋아하면서 답답한 점 있으셨나요. 무엇을 보고 입덕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무조건적인 박수갈채 ‘주접’도 환영합니다.

구글 설문조사 링크 https://forms.gle/pw1RwdoDWo29RzSt7

이아름 기자 areum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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