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이주배경아동과 청소년들이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권 보장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어 내년 3월31일 종료되는 ‘한시적 구제대책’의 상시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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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경 | 전국팀장
6년 전 이맘때다. 취재차 만난 아버지는 휴대전화 속에 저장된 어린 아들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화면을 가로지르자, 9살 민준(가명)이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 속 민준이는 가늘고 작은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 있거나, 환자복을 입고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날 민준이도 함께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민준이가 이틀 전 열이 오르고 코피를 쏟아 응급실에 실려 가 만나지 못했다. 민준이는 골수에서 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호중구감소증을 앓고 있었다. 간 이식 합병증이었다. 골수 이식을 받으려면 1억5천만원이 넘는 비용을 내야 했으나, 아버지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아들의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무등록 체류자였고, 민준이와 민준이 누나는 ‘무국적·미등록’ 상태였다.
민준이는 가족끼리 바다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기사가 나간 지 1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인처럼 자란 아이는 살아서도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미등록 이주아동’이었다. 한국 사회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었을 아이의 부고를 작성할 때, 사진 속 민준이의 반달눈이 자꾸만 떠올랐다.
민준이가 6년 만에 기억에서 되살아난 건 지난 12일 강태완씨의 사고 기사를 보고 나서다. 태완씨는 지난 8일 전북 김제시에 있는 특장차 생산업체 에이치알이앤아이(HR E&I, 옛 호룡)에서 일하다가 10t짜리 건설기계 장비와 굴착기 사이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태완씨는 6살에 몽골에서 한국으로 온 뒤 줄곧 한국에서 살았던 ‘미등록 이주아동’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언제든 강제 출국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26년 동안 한국 사회에 정착하려 애썼으나, 그는 한국에 단기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얻자마자 32살 짧은 생애를 마쳤다.
민준이나 태완씨처럼 한국에 사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자신을 ‘유령’이라고 한다. 이주민 인권단체들은 한국에 사는 미등록 이주아동을 약 2만명으로 추정한다.
2019년 12월 당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장기 체류 미등록 청소년 두명이 국가인권위원회에 낸 진정을 계기로 법무부는 ‘장기 체류 아동 교육권 보장을 위한 체류자격 부여 방안(구제대책 개선안)’을 내놨다. 국내 체류 기간, 공교육 이수 등의 요건을 충족하면 임시 체류할 수 있는 비자(학생 땐 D-4, 고교 졸업 뒤 G-1 비자)를 부여하는 안이다. 하지만 까다로운 요건을 요구하는 이 대책마저 내년 3월31일 이후엔 종료된다.
대책이 종료돼 ‘구제’되지 못한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민준이나 태완씨처럼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도, 대학에 진학할 수도 없다. 또 외국인등록번호가 없어 체험학습을 가기 위해 안전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고, 경시대회나 체육대회에도 참여할 수 없다. 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에 입력되는 이들의 외국인등록번호 뒷자리는 ‘0000000’일 뿐이다. 자신 명의의 통장이나 휴대전화를 만들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발을 딛고 있는 나라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본국’으로 언제든 강제로 추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정부는 이들에게 머물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미등록’ ‘비합법’ 신분으로 방치하고 있다. 매년 인구 감소와 인력난을 해결하겠다며 이주노동자와 유학생을 유치하고, 이들의 국내 정착을 돕는 다양한 정책을 편다. 하지만 이미 한국의 공교육을 받으면서 자라, 언어·문화 등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에게 정착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태완씨의 죽음 뒤 이주배경 아동·청소년 당사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 ‘위아올드리머스’(WE ARE ALL DREAMERS·우리 모두는 꿈꾸는 사람들)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꿈을 꾸고 키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우리에게는 머물 권리가, 미래를 꿈꿀 권리가, 가족과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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