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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신경아의 조각보 세상]트럼프와 미국의 4B 운동, 한국의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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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여성 사이 관심 커진 ‘4비 운동’
비혼·비출산 등 선언, 한국이 시초
최근 ‘탈코르셋’ 등 4T 개념도 등장
사회적 결핍에 대한 청년들의 저항

한국에서 시작돼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것은 K팝이나 K드라마만은 아닌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에서는 한국의 4B 운동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 CNN이나 NBC 등 미국 언론뿐 아니라 영국의 가디언 등에서도 관련 기사를 싣고 있다. 영어로는 ‘4B 무브먼트(movement)’라고 쓰지만, 정확한 한국어명은 ‘4비(4非) 운동’이다. 비혼·비출산·비연애·비섹스, 즉 결혼과 출산, 연애와 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젊은 여성들 사이의 메시지 교환으로 전파되고 있다.

미국 여성들의 4B 운동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액티비즘이다. 성적 학대 혐의를 받는 트럼프는 이미 1기 집권 당시부터 여성혐오와 성차별로 유명했고 3명의 보수주의 대법관을 임명해 연방대법원에서 5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임신중지법이 폐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트럼프와 러닝메이트 밴스는 여성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발언을 곳곳에서 쏟아냈다. 트럼프는 “여성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성을 보호하겠다”는 발언으로 모욕감을 주었고, 밴스는 “자식 없이 고양이나 키우는 여성들(childless cat ladies)”이라고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를 공격했다. 그 결과는 여성혐오와 안티페미니스트 발언지인 남성 중심 인터넷 커뮤니티 매노스피어(manosphere)의 영향력 확산으로 나타났고, 이번 선거는 매노스피어의 승리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2024년 대통령 선거는 미국의 경제 불안과 국경 문제가 젠더 이슈를 삼켜버린 선거였다. 따라서 트럼프는 2020년 선거보다 여성 표를 더 많이 받았다. 출구조사 결과에서 트럼프는 라틴계 여성과 대학 졸업 학위를 갖지 않은 백인 여성들에게서 4년 전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한 언론은 “나 자신의 이익이란 것이 여성으로서 집단적 권리와 자유인가 아니면 나의 신용카드로 식료품을 사지 못해 가족을 먹일 수 없는 것인가”라고 반문하는 트럼프 지지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여성의 권리보다 당장 생계가 더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승리는 많은 여성에게 불꽃을 댕겼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11월20일자는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27세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녀는 틱톡에서 4B 운동을 접하고 공화당원인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했다. 선거 직후 구글에서는 4B 운동의 검색량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트럼프의 승리는 미국에서 가부장제가 살아있고 번성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명종 같은 것이었다. 여성들은 4B 운동을 통해 전통적인 성역할과 이성애주의, 재생산 통제에 저항할 것”이라는 사라 류 영국 에든버러 대학 교수의 인터뷰를 덧붙였다.

4B 운동의 원조 격인 한국에서 그것은 점차 페미니즘의 경계를 넘어서 왔다. 2015년 전후 여성의 꾸밈노동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실천한 ‘탈코르셋 운동’,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각성한 청년 여성들의 안전에 대한 요구, 미투 운동, 스토킹과 교제폭력에 대응하는 입법 요구, 낙태금지법 폐지와 신체적 자기결정권 요구,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3·8 여성의날 파업 등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간을 열었다.

최근 필자가 공동연구로 수행한 논문 “‘성불평등’과 ‘저출생’의 불행한 만남: 한국의 인구위기와 청년 여성의 인식”에 따르면, 4B 운동은 두 갈래로 전개돼 왔다. 하나는 ‘비혼’이 또 다른 생활양식으로서 청년세대에서 보편성을 얻게 된 것이다. 40대에 들어설 때까지 비혼인 남성이 50%를 넘고 여성도 비슷한 규모에 이를 것이라는 조사 결과는 비혼·비출산으로 내몰리는 청년이 늘고 있다는 사실과 비혼이 반드시 비자발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동시에 시사한다. 4B 운동의 또 다른 갈래로는 퀴어나 ‘6B4T’, 즉 ‘비소비’(여성혐오 마케팅 기업의 상품 불매)와 ‘비돕비’(비혼 여성이 비혼 여성을 돕는다)를 포함한 6B, ‘탈코르셋, 탈종교, 탈오타쿠, 탈아이돌’을 가리키는 4T 개념까지 등장하고 있다.

4B 운동은 남성혐오가 아니다. 그것은 남성중심적 삶이 표준이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겠다는 각성의 표현이다. 물론 이런 실천의 무리에 여성만 있는 것도 아니다. 비혼 남성도 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운동에 청년들의 마음이 쏠리는 이유다. 그들이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환경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4B 운동은 ‘사회적 결핍’에 대한 청년들의 저항이다.

경향신문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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