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희곡상]
장막 희곡 - 김민정 ‘미궁의 설계자’
김민정 작가는 “여전히 창작이 즐거운 걸 보면 내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라며 웃었다. /이태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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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차범석희곡상 장막 희곡 부문 수상작 ‘미궁의 설계자’는 상복이 있는 작품이다. 올해 서울연극제에서 우수작품상을 비롯해 연출상, 연기상, 신인상 등을 받았다. 김민정(50) 작가의 희곡상만 쏙 빠졌다. 차범석상 수상 소식을 알렸을 때 작가는 “상복 없는 작가에게 정말 귀한 소식이다. 큰 힘이 된다”며 기뻐했다.
어선 밀입국자 집단 사망 사건을 다룬 2007년 작 ‘해무(海霧)’, 캄보디아 위안부 피해자 훈 할머니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하나코’(2015),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고(故)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모티브로 녹아 있는 ‘미궁의 설계자’까지…. 그는 어떤 픽션보다 드라마틱한 현실의 우물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일을 가장 잘하는 작가다. “실제로도 뉴스를 즐겨봐요. 관심이 가는 소재가 보이면 자료 조사를 하면서 작품에 접근해 들어갈 때도 많고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시절, 겨울엔 꽁꽁 얼도록 춥고 여름엔 숨 막히게 더웠던 석관동 옥탑방에서 쓴 ‘해무’의 시작은 2001년 벌어진 ‘제7태창호 사건’ 뉴스였다. 중국인 49명, 조선족 11명이 배에 숨어 전남 여수로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26명이 질식사하자, 선장과 선원들이 사망자 시신을 바다에 투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참혹함에 온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뉴스에서 생존자 증언을 듣게 됐어요. ‘선창 등에서 시신을 바다에 버린 뒤, 선장과 선원들이 말없이 소주만 마시더라’고 하더군요. 의도치 않은 큰 비극에 깊숙이 연루된 보통 사람들의 낭패감이 보이는 것 같았죠.” 이 연극은 봉준호 감독이 각본 작업에 참여해 ‘살인의 추억’ 공동 각본가였던 심성보 감독 연출로 2014년 영화화되기도 했다.
또 다른 대표작 ‘하나코’는 위안부 피해자 캄보디아 훈 할머니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태평양 전쟁 통에 헤어진 동생이 캄보디아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이야기. 이 여정에서 할머니는 실은 동생이 폭격으로 이미 죽었다는 걸, 그 충격에서 벗어나려 평생 동생은 죽은 게 아니라 전쟁 통에 헤어진 거라고 믿고 살아왔다는 걸 깨닫는다.
수상작 ‘미궁의 설계자’는 지금은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에서 엇갈리는 세 개의 시간, 세 개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다. 극 중 이 건물의 설계자는 당대 최고 건축가 ‘김’의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는 ‘양 실장’. 그가 이 건물을 설계하는 1975년, 그곳에 끌려와 고문당하는 대학생 ‘경수’의 1986년, 그리고 기념관이 된 건물에 다큐멘터리 감독이 찾아오는 2020년의 시간이 무대 위에서 서로 스쳐 지나며 엇갈리고, 끝내는 서로 맞닿기도 한다.
극 중 ‘김’으로 불리는 건축가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현대 건축의 거장. 그의 다른 건축물에선 예술적 성취로 상찬받던 특징이 대공분실 건물에선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세로로 좁고 길게 난 창은 고문 피해자가 뛰어내릴 수 없게 하는 역할, 고문실이 있던 5층으로 직접 이어진 나선형 원형 계단은 방향 감각을 상실케 하고 공포를 극대화하는 역할이다. 작가는 “이 연극은 누굴 탓하기 위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극 중 대공분실의 설계자 ‘양 실장’을 비난하려고 쓴 게 아니에요. 사는 동안 누구나 선택의 순간을 만나잖아요. 시대의 무게, 외부의 압력에 맞닥뜨렸을 때 예술가의 딜레마에 대해, 그 선택의 결과에 관한 성찰에 대해 말하고 싶어 허구의 인물들을 배치했습니다”
연극배우인 남편과 이번에 미대 입시를 본 딸(18)과 아들(15)을 뒀다. 작가는 “결혼기념일 전날 남편에게 ‘선물’이라며 알렸더니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더라”고 했다. 작가는 “생활인의 자세로 우직하게 글을 써왔다”고 했다. “저는 전업작가니까요. 누군가 지금이 전성기냐고 묻는다면 저는 굳이 아직은 아니라고 하고 싶어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요.”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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