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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이 | 자립준비청년
보육원 퇴소 후 자취방을 구할 때 어려운 용어도 많은데다 집 계약을 할 때 실수를 할까 두려운 마음에 보육원 선생님께 연락드린 적이 있었다. 스스로 결정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조언을 얻고 싶었다. 나의 고민을 들은 선생님은 “이젠 자립했으니 스스로 해야지”라는 말을 시작으로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차근히 해주셨다. 홀로 살아가야 하는 나를 걱정하며 건넨 말이었겠지만 괜히 서운함이 들었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로 기가 죽어 있었던 터라 ‘스스로 해야 한다’는 말이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해내야 한다’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내심 선생님에게 의지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내가 느끼는 자립의 무게에 공감해주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자립생활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인상만 얻게 된 일이었다.
이런 내게 자립을 재정의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하는 장학사업에 선발되어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날이었다. 나를 비롯해 20명이 넘는 자립준비청년이 있었는데 우리는 비슷한 유년 시절을 살아온 덕분에 빠르게 친해졌다. “사회에서도 나랑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다니” 한 친구의 말을 시작으로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진솔하고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자신의 생활에 어려운 점을 나누면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라며 힘과 위로를 주고받고, 또 자신이 알고 있는 장학금 정보와 생활의 노하우를 알려주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였기에 가능했던 긴 시간의 고백과 경청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커뮤니티’가 가진 힘은 컸다. 그날 친구들의 자립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잘 살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친구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고 삶의 의지가 생겼을 뿐 아니라 유익한 자립 정보나 삶의 노하우 덕분에 삶의 질도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고군분투했던 저마다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이 커뮤니티 안에서 이왕이면 나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름다운재단 자립준비청년 지원 공익 캠페인 ‘열여덟 어른’의 일환으로 ‘허진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허진이 프로젝트’는 선배 자립준비청년들이 아동양육시설에 방문해 보호아동들에게 자립교육을 하는 프로젝트였다. 교육에서는 우리가 보육원 퇴소 뒤 경험한 자립생활과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을 알려줬다. 내가 경험했던 어려움을 누군가는 겪지 않길 바라는 자립 선배의 마음을 담아 후배들이 자립생활에 갖는 막막함과 불안함을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교육이 끝난 뒤에는 후배들도 나처럼 ‘잘 살고 싶다’고 다짐하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커뮤니티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2021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당사자 모임의 운영 규모와 지원을 확대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현재는 기업이나 민간 차원에서 하는 자립준비청년의 커뮤니티 활동 지원도 많이 생겨났다. 커뮤니티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청년들 간에 형성된 관계망이 지지체계를 구축해 정서적 안전망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커뮤니티에서 위로를 얻었던 나의 경험과 최근 바뀌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통해 ‘자립은 스스로 서되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립(自立)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 일이지만 이 과정에는 누군가에게 마음 놓고 의지하고, 힘과 응원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누군가는 입시를 끝내고 홀가분하게 연말을 맞이하는 반면 누군가는 보육원 퇴소를 앞두고 걱정과 불안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그들에게 ‘마음껏 의지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다. 추운 겨울날 서로 의지하며 온기를 나누는 것처럼 손을 내밀면 기꺼이 잡아주는 선후배 자립준비청년들과 함께 자립이라는 낯선 세상에 따듯하게 안착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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