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포즌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소장이 2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타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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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와 무역 질서가 100여 년 전으로 뒷걸음질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한 ‘보편 관세’는, 대공황 당시인 1930년 미국이 ‘스무트 홀리 관세법’을 제정해 수입품에 때린 초고율 관세와 닮은 꼴이다. 1930년대 미국이 불 붙인 관세와 보호무역주의 전쟁으로 5년여 만에 전 세계 교역량의 70%가 증발했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역사의 후진은 수출 제조업 국가인 한국엔 악재를 넘어 생존이 달린 문제다. 국제 질서의 붕괴와 격랑을 넘어설 해법이 무엇인지 미국 싱크탱크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애덤 포즌(Adam Posen) 소장에게 물었다. 피터슨연구소는 진보 성향의 브루킹스연구소, 보수 성향의 헤리티지재단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민간 정책 연구 기관이다. 정치색이 옅고 국제 경제 분야에서는 세계적 권위를 갖고 있다. 한반도 사정에도 밝다. 인터뷰는 지난 25일 서울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 건물에서 진행했다.
포즌 소장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은 미국과 중국 바깥에서 제3의 경제적 영토를 마련하고, 정부 지출을 늘리는 확장적 재정 정책으로의 전환을 통해 경기 침체를 막아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이유를 뭐라고 보나?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의 고물가(인플레이션)와 실질 소득(물가를 감안한 소득) 악화다. 바이든 정부가 노동자 계층에게 정책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청년층 표심 등을 고려해 권리 문제에 집중한 것도 정치적 패착이다.”
— 트럼프노믹스(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정책)가 정말 과격한 공약 그대로 추진될까? 그 영향은?
“트럼프 당선인의 관세 인상, 대대적 감세, 이민자 추방 등 정책 조합은 모두 인플레이션을 높일 것이다. 다만 연구소 내에선 트럼프가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정책금리 인상 가능성이나 주식시장 폭락 등을 우려해 그가 말한 걸 모두 그대로 이행하지는 못할 거라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저는 트럼프가 이런 정책 부작용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정권 출범 후 2∼3년간 기존에 공언했던 대로 각종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본다.”
트럼프노믹스의 ‘3대 축’인 관세 인상, 감세, 이민자 추방이 모두 미국의 물가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는 염려는 지난 대선 이전부터 제기됐다. 감세로 시중에 돈이 풀려 경기가 달궈지는데, 수입품 가격과 임금이 함께 오르며 주춤했던 물가가 다시 뛸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이 정책금리를 올리면 달러 강세는 더 심해진다.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한 트럼프의 3대 경제 정책이 ‘고물가·고금리·강달러”라는 세 날개의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19일 스페이스엑스의 스타쉽 로켓의 테스트 발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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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노믹스의 이행은 한국 경제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단기적으론 한국 경제에 이득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성장세가 높아지면 대미 수출이 늘고 수출 기업도 고환율의 혜택을 볼 수 있어서다. 또 미국의 대중 규제 강화로 한국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단기적인 수혜일 뿐이다. 우선 강달러로 인해 한국은 물가와 통화 정책 대응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비효율적인 국방비 지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대미 수출 증가가 한국의 대중국 수출 감소분을 상쇄하고 대체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여기에 전반적인 투자의 리스크(위험)이 커지는 등 성장에 하방 압력이 생길 것이다.”
포즌 소장은 트럼프노믹스의 경기 부양 정책으로 세계 경제의 올해와 내년 실질 성장률이 기존 3.1∼3.2% 남짓에서 3.5% 정도로 올라갈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미국의 ‘나 홀로 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미국이 점화한 고금리·강달러는 부채가 많은 저개발 국가들의 파산 위험을 확대하고, 한국의 경우 달러 강세때 기준금리 인하가 원화 가치 하락을 더 부채질할 수 있는 탓에 통화 정책의 발이 꽁꽁 묶이게 된다.
포즌 소장은 “미국 연준이 내년 6월 또는 7월쯤 정책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며 “이는 미국 경제와 고용시장, 생산 등이 생각보다 강할 뿐 아니라, 트럼프노믹스 때문”이라고 짚었다. 고물가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선언하며 지난 9월 4년 반 만에 정책금리 인하로 돌아선 미국 연준이 트럼프 정책 여파로 다시 금리 인상에 나설 수 있다는 이야기다.
— 한국은 경기 침체와 저성장·저물가 우려로 기준금리를 낮춰야 하는 상황이다. 앞으로 거시 정책을 어떻게 운용해야 할까.
“한국은 근본적으로 재정 정책의 기조를 바꿔야 한다. 지금은 경제 문제를 통화 정책으로 해결하려 하기 보다, 공공 투자와 지출을 훨씬 더 확장적으로 운용하는 게 답이다. 한국의 재정당국은 그간 북한과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재정을 비축해야 한다고 했으나, 현시점에서 통일은 현실적이지 않다. 늘어나는 지출의 일부는 국방에 쓸 수밖에 없겠지만, 이외에 녹색 에너지 전환 가속화를 위한 지출, 특히 전력망과 인프라(그리드)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 미·중 갈등으로 국경의 장벽이 높아지며 한국이 좋은 이민자를 유치할 기회가 생긴 만큼 이민 유치도 필요하다.”
— 미국 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와 반도체법(칩스법)은 정말 폐지될까?
“유지될 거라 생각한다. 다만 트럼프 정부는 전기차 보조금을 줄이고 하이브리드 차량 보조금을 확대하는 등 기존 지원 제도를 손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에 현지 투자를 많이 해 미국의 울타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반도체·배터리·전기차 등은 계속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작 가장 큰 위험은 아직 미국에 투자하지 않은 분야들이다. 이런 기업들은 향후 미·중 갈등 속에서 미국과 중국시장 모두 접근성이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애덤 포즌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소장이 2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타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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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정부와 기업은 미·중 갈등이 더 심해지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나.
“투 트랙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미국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미국의 성장에 올라타는 전략을 택할 수 있다. 물론 이를 통해 한국의 대중 무역 악화를 다 메울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 아닌 다른 국가들과 협력해 미·중 바깥에서 경제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자유시장을 중시하고 국제 무역질서를 지키려는 아세안(동남아시아 국가연합),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CPTPP) 회원국, 유럽 등과 협력해 다자주의적 무역 관계를 구축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 세계화가 종말을 맞고, 과거처럼 보호무역과 전쟁의 위험이 다시 커지는 시대가 올까?
“저는 미래를 암울하게 전망하지 않는다. 세계화가 종말을 맞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보호무역을 앞세웠던) 지난 트럼프·바이든 정부를 지나면서도 무역은 놀라울 정도로 회복 탄력적이라는 걸 보여줬다. 무역은 여전히 거대하고 글로벌 공급망도 견고하게 버티고 있다. 앞으로 트럼프 당선인과 중국 시진핑 주석이 나쁜 정책을 통해 많은 실수를 하며 일반인들의 삶도 타격을 받겠지만, 잦은 실수로 정책 신뢰가 떨어지면 이들의 힘도 약해질 수 있다.”
— 트럼프 당선인은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규제를 풀어 미국의 정부 부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가능할까? 미국의 ‘달러 패권’이 흔들리진 않을까.
“근본적으로 비트코인은 결제 수단 또는 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대체 투자 수단이 될 수 있다. 다만 가상화폐는 근본적으로 가치의 근간이 없다. 가상화폐가 대체 자산으로 자리 잡으면 미국 정부 부채는 더 심화될 것이다.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를 지금보다 덜 사게 되면 국채 금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트럼프 정부가 가상화폐 규제를 푼다면, 기존 금융 시스템과 이를 분리해 가상화폐 시장의 붕괴가 금융 시스템 위기로 전이되는 걸 막아야 한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블랙스톤 그룹 창립자이자 전 미국 상무부 장관 및 대통령 국제경제보좌관을 지낸 피터 피터슨 회장이 1981년 설립한 미국 워싱턴의 대표 민간 정책 연구 기관. 중립적 정치 성향과 국제 경제 분야의 전문성을 갖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산하 ‘싱크탱크와 시민사회 프로그램’이 가장 최근 발표한 세계 싱크탱크 평가(2020년 기준)에서 세계 9위, 미국 싱크탱크 중 1위를 차지했다.
아담 포센 소장은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 이코노미스트, 영국은행 통화정책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2013년부터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올리비에 블랑샤르, 모리스 옵스펠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 오바마 정권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연구소의 대표 거시 경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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