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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어른인 척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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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스파이가 된 남자’


오티티의 자극적인 콘텐츠에 지쳐 훈훈한 가족 드라마 ‘영 셸든’ 마지막 시즌 이후 시청을 접고 있던 넷플릭스에서 순한 맛의 매력적인 드라마를 발견했다. ‘스파이가 된 남자(A man on the inside)’.



은퇴한 노인이 스파이가 된다는 소재에 눈길이 가 정주행을 시작했는데 ‘그레이스 앤 프랭키’ 이후 가장 유쾌한 노년 드라마였다. 특히나 ‘그레이스 앤 프랭키’와는 또 다른 메시지를 준다는 점에서 한 단계 진화한 노년 콘텐츠다. 은퇴한 건축학 교수로 1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무료함에 어쩔 줄 모르고 살던 주인공 찰스는 우연히 신문에서 ‘조사보조원 모집:75~85살’ 공고를 보고 지원한다. 한 실버타운에서 어머니의 값비싼 보석을 훔쳐간 범인을 찾아달라는 의뢰인의 요청을 받은 사설탐정이 이곳에 잠입할 노인을 구하려고 낸 것으로 찰스는 원제목처럼 한 달 동안 이곳의 ‘내부자’가 되어 범인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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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차 에피소드별로 각 제목이 007시리즈나 존 르 카레의 소설 등을 패러디해 창작자의 스파이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드러나지만 주인공 찰스가 뒤늦게 적성을 찾은 탐정/스파이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자신의 건축학 지식을 자랑하기 좋아하는 지루한 꼰대일 뿐 관찰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주변 인물들의 인상착의를 묻는 말에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실버타운 주민으로 잠입한 뒤 “휴대폰, 카메라 안경, 녹음기 다 준비됐죠?” 질문에 그것들이 들어있는 것처럼 주머니 이곳저곳을 툭툭 치지만 실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 방으로 돌아가는 허술한 인물이다. 노인 탐정계의 지존인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 이 꼴을 본다면 가슴을 치고 답답해할 노릇이다.



드라마에서 눈길을 끈 건 찰스와 그를 고용한 줄리의 관계다. 차갑고 일 중독자인 줄리는 아버지뻘인 찰스를 피고용인으로만 대할 뿐 ‘어르신 대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찰스가 날씨나 풍경에 관한 품위 있고 한갓진 노인의 코멘트를 시작하는 순간 바로 말을 끊고 일 이야기나 하라고 한다. 물론 노인이라 특별히 냉대하는 건 아니다. 젊은 비서에게도 팔순이 코앞인 찰스에게도 고용인 줄리는 똑같이 냉정하게 대한다. 이 모습을 보며 무릎을 쳤다. 영화 로버트 드 니로, 앤 해서웨이 주연의 영화 ‘인턴’(2015)이 묘하게 짜증을 불러일으켰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어른스러움’에 대한 기대와 피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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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스파이가 된 남자’. 사립 탐정 줄리(왼쪽)는 아버지뻘인 찰스(오른쪽)에게 냉정한 고용인이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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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도 시작은 ‘스파이가 된 남자’와 비슷하다. 기업 임원 출신으로 은퇴한 남성이 젊은 여성 시이오가 운영하는 스타트업 회사의 인턴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스타트업의 기업 문화를 모르는 70살의 벤은 처음에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지내지만 나중에는 젊은 시이오 줄스의 멘토가 되어 그녀의 집안 문제까지 다 해결해준다는 이야기.



물론 경험 많은 노인의 지식은 유용한 것이다. 건물 50개를 지은 이의 기술과 지혜가 이제 막 하나 쌓아 올린 이보다 많은 것은 자명한 이치다. 하지만 이 경험과 함께 인덕이 쌓이고 삶 전체의 혜안으로 이어지는 건 일종의 퀀텀 점프다. 주변을 돌아보시라. 경력과 인덕이 정비례로 쌓여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 ‘어른스럽지’ 못한 노인보다 더 별로인 건 ‘어른스러움’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이다. 평소에는 노인들의 느리고 고루한 모습을 못견뎌 하면서 ‘인턴’의 줄스처럼 징징거리고 싶을 때만 자신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어른’을 찾는다.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를 찾고 쓰면서 점점 더 불편해지는 말이 ‘어른’ 또는 ‘어른스러움’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성인이 됐을 뿐 지혜, 혜안, 품위, 관용 이런 말들이 녹아들어 있는 ‘어른’이 되는 데는 대체로 실패했다. 실패하는 게 당연하다. 노년이라는 말에 손쉽게 갖다 붙이는 그런 단어들은 나이가 먹으면 흰 머리가 생기는 것처럼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노년의 지혜를 쉽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지혜가 부족하다는 역설은 이런 책과 강연을 십 분만 봐도 깨달을 수 있다.



노년과 청년이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스파이가 된 남자’에 담겨있다. 그저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보상받는 것이다. 어른이라고 더 대접받을 기대도, 젊은이라고 어리광부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성인 대 성인으로 만나는 것뿐이다. 이제 정년 연장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다. 각자의 억울함을 토로하기 전에 줄리와 찰스가 함께 일하는 법을 보면서 공존의 지혜를 배워보자.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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