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우 정치부 차장 |
북한이 러시아에 대규모 파병한 사실을 국가정보원이 처음 공식 확인한 건 지난달 19일이었다. 이 파병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은 ‘먼 나라’ 얘기가 아닌 한반도 안보를 흔들 직접적 위협으로 부상했다. 그런 만큼 대통령실은 “국제사회와 공동으로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해 나가겠다”고 경고했다.
그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24일, 윤석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직접 공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더 유연하게 북한군 활동 여하에 따라 검토해 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살상 무기 지원 가능성을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 특히 이날 윤 대통령은 ‘단계별 무기 지원’ 조건으로 “북한이 특수군을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견한다면”이란 전제까지 콕 집어 특정했다. 북한이 추가 파병 규모를 늘리거나 실제 전투에 투입돼 살상 행위 등에 나서면 사실상 정부가 무기 지원을 할 거라는 일종의 ‘레드라인’을 공개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경고 폭탄’을 비웃듯 북한은 이후 파병 규모를 쭉쭉 늘렸다. 국정원은 최근 북한군이 러시아군 공수여단 등에 배속돼 훈련을 받고 있고, 이 가운데 일부는 이미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이처럼 파병 상황의 심각성은 더 깊어졌지만 정부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입장은 오히려 한발 물러선 모습이다. 앞서 우리 정부의 무기 지원 발언 등에 한껏 고무된 우크라이나는 이번에 국방장관을 대표로 한 특사단까지 한국에 파견해 ‘무기 리스트’를 건넨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부는 내부적으로 당장 쉽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의 무기 지원 딜레마가 커진 건 결국 ‘트럼프의 귀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달 초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줄곧 우크라이나 전쟁 조기 종식 기조를 내세웠다. 우리로선 그런 트럼프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변수’로 무기 지원 딜레마가 커진 만큼 고민의 무게도 커진 건 당연하다. 다만 트럼프 재집권 가능성이 작지 않았던 상황에서 굳이 미 대선 전에 ‘레드라인’으로 인식될 워딩까지 내놓으며 무기 지원 가능성을 거듭 시사한 것은 아쉽다. 섣부른 발언이 우리 발목을 잡을지 몰라서다. 외교 소식통도 “말은 세게 했는데 아무 후속 조치도 안 내놓으니 ‘양치기 소년’이 된 꼴”이라고 했다.
기대치가 커진 우크라이나에 실망감을 안겨주는 것도 우리로선 부담이다. 500억 달러로 추정되는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서 후순위로 밀릴지 모른다. 정부 소식통은 “처음부터 안 주는 것보다 줄 것처럼 보이다 안 주는 게 더 배신감이 클 수 있다”고 토로했다.
북한 파병 후 우리의 초기 대응은 분명 설익었고 또 아쉽다. 하지만 본선은 이제부터다. 내년 1월 트럼프 2기 출범은 코앞에 다가왔고, 우크라이나의 무기 지원 요청은 더 절실해질 것이다. 최근 외교차관이 “한국산 무기가 러시아인 살상에 사용되면 양국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날 수 있다”고 경고한 러시아는 그 협박 수위를 높여 나갈 것이다. 어쩌면 대미, 대러, 대우크라 관계까지 모두 얽힌 이 외교 고차방정식을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가 집권 후반부에 접어든 윤석열 정부의 최우선 외교안보 과제일지 모른다.
신진우 정치부 차장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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