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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송혁기의 책상물림]묵은 술, 오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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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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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주 가운데 하나로 ‘루저우라오쟈오(瀘州老)’가 있다. 루저우는 예로부터 술로 유명해서 주성(酒城)이라고 불려온 고장이고, 라오쟈오는 이곳에 있는 오래된 교(), 즉 술을 발효시켜 저장하는 ‘지하 광’을 말한다. 1573년에 만들었다는 궈쟈오(國)가 남아 있어 더욱 유명하다. 수백 년 묵은 발효로만 낼 수 있는 깊은 향을 지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왔다.

저장 기술은 고대에도 필수적이어서, 땅굴처럼 판 거대한 지하 광이 일찍부터 만들어졌다. <화식열전>의 선곡 임씨는 지하 광으로 큰돈을 번 인물이다. 진시황이 허무하게 죽자마자 전국 각지에서 호걸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의 집중 타깃이 된 곳이 망해버린 진나라의 창고였다. 다들 값어치 나가는 금은보화를 차지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 임씨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무거운 곡식만 묵묵히 지하 광으로 옮겨 쟁여두었다. 그런데 항우와 유방의 대치가 길어지면서 인근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곡식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오르는 바람에, 호걸들이 가져갔던 금은보화는 결국 임씨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사마천은 임씨 이야기를 통해서 취하고 버리는 때를 잘 알아야 재산을 불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늘날도 트렌드를 읽는 능력이 재테크의 성패를 좌우한다고들 말한다. 다만 단순히 시류를 따라가기만 해서는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렵고 한두 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야 가능하다. 필자는 책상물림 서생이라 주식이나 투자에는 문외한이지만, 때를 알고 내다보는 지혜가 돈 버는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은 미루어 알 수 있다.

임씨는 부자가 된 사람이 빠지기 쉬운 사치를 멀리하고,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며 직접 농사짓고 소를 길렀다. 값을 더 쳐주더라도 좋은 땅만 사들이고 공적인 일을 마무리한 뒤에야 술과 고기를 즐겼다. 이러한 원칙이 가문의 전통으로 이어져서 이들은 몇 대에 걸쳐 대부호로 살았다고 한다. 눈앞의 이익에 좌우되지 않고 본분과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더 길고 큰 이익을 지킨 것이다. 시류를 포착하는 안목 못지않게 여전히 되새겨볼 만한 지혜다. 마치 오래된 지하 광에서 발효되어 깊은 향을 머금은 술처럼.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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