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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꿀벌 이야기[이준식의 한시 한 수]〈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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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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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든 산봉우리든 가릴 것 없이, 세상에 좋은 풍광은 다 점령되었구나.
온갖 꽃에서 따다가 꿀을 만들었지만, 누굴 위한 고생이며 누굴 위한 달콤함인가.
(不論平地與山尖, 無限風光盡被占. 采得百花成蜜後, 爲誰辛苦爲誰甛.)

―‘벌(봉·蜂)’나은(羅隱·833∼909)


온 산야를 헤집고 다니며 꿀을 모으는 꿀벌. 세상의 좋은 풍광은 다 차지하는 호사를 누리는 듯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수확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누군가가 그간 고생하여 이룬 달콤한 성과를 가로채 갔기 때문이다. 바지런한 꿀벌과 불로소득을 취하는 무리, 수고하는 자와 혜택을 입는 자가 선명하게 대비되는 사회에 대한 일갈처럼 들린다. 동요 같은 발상이려니 했는데 실은 자못 심각한 주제로 반전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맘껏 향유하는 꿀벌의 특권을 부러워하는가 싶더니 상황이 급전직하로 뒤바뀐 것이다. ‘누굴 위한 고생이며, 누굴 위한 달콤함인가’라는 동어 반복 때문일까. 시인의 개탄이 한결 도드라져 보인다.

나은이 호된 삶의 풍파를 겪으며 시를 세태 풍자의 한 도구로 삼았다면, 같은 소재를 취했으되 전원시파 시인의 발상은 이와 대조적이다. ‘꿀벌, 인간의 양식은 먹지 않지만 이슬을 술 삼고 꽃을 양식 삼는다네./꿀 만들 땐 느긋하고 꽃을 딸 땐 바쁜지라, 다 만들어진 꿀에는 온갖 꽃향기가 담긴다네.’(‘벌’, 남송 양만리·楊萬里) 벌이 이슬과 꽃을 술이나 양식으로 삼을 리 없고 꿀 만드는 과정 또한 느긋할 리 만무하다. 하나 꿀벌의 생태와 상관없이 저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사뭇 낭만적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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