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7 (금)

[단독] “장애 아들 위해 SW 개발… AI 교과서까지 만들게 됐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에듀테크 에누마 이수인 대표

조선일보

글로벌 에듀테크 기업 에누마의 이수인 대표가 만든 교육 프로그램을 가장 먼저 써보는 ‘소비자’는 그의 사랑스러운 두 자녀라고 한다. 이 대표는 “장애가 있는 큰아들은 에누마의 소프트웨어로 수 개념을 배웠는데, 학창 시절의 나와 달리 수학을 좋아해 기쁘다”면서 “둘째인 딸이 내가 만든 소프트웨어로 또랑또랑 한글 책 읽는 연습을 할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높은 확률로 지적장애와 자폐 위험이 있음.’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생아 집중치료실. 30대 ‘초보 엄마’는 예정일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아들이 누워 있는 인큐베이터 옆에서 희소 질환에 대한 논문을 읽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출산 전 그녀는 서울대(조소과)를 나와 국내 게임 업계를 대표하는 엔씨소프트에서 게임 디자이너로 일했다. 같은 회사에서 잘나가는 게임 개발자였던 남편은 과학고 졸업 후 서울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1학년 때 학내 하이텔 동호회서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 큰 어려움 없이 지낸 이들 부부에게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그때 의사 슬레이글이 다가와 물었다. “헤이, 맘! 예전에 무슨 일 했어?” “나랑 남편은 비디오게임을 만들었어.” 순간 의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멋지다! 여기 있는 아이들에게 그런 기술이 꼭 필요한데!” 그제야 주변 다른 장애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온갖 신기술이 게임 산업에 쓰이고 있는데 장애아 학습 프로그램은 만듦새나 사용성이 형편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지난달 29일 서울 충무로에서 만난 이수인(48) 에누마(Enuma) 대표는 “내가 가진 기술을 현실과 접목해 장애아들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교육 소프트웨어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며 “남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린 아이들도 즐겁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내놓자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먼저 인공지능(AI) 음성 인식을 사용해 영단어 배우는 앱, 동전 세는 앱을 만들었다. 엔씨소프트와 패턴 맞추기 등 게임을 담은 앱도 개발했다. 장애아들 부모는 물론이고 특수교육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입소문 나면서 2011년 이 앱은 미국에서 권위 있는 아동 제품상 중 하나인 ‘페어런츠 초이스 어워드’ 금메달(디지털 앱 부문)을 획득했다.

조선일보

글로벌 에듀테크 기업 에누마의 이수인 대표가 만든 교육 프로그램을 가장 먼저 써보는 ‘소비자’는 그의 사랑스러운 두 자녀라고 한다. 이 대표는 “장애가 있는 큰아들은 에누마의 소프트웨어로 수 개념을 배웠는데, 학창 시절의 나와 달리 수학을 좋아해 기쁘다”면서 “둘째인 딸이 내가 만든 소프트웨어로 또랑또랑 한글 책 읽는 연습을 할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2년 남편 이건호(에누마 최고기술책임자)씨와 함께 글로벌 에듀테크 기업 에누마를 창업했다. 이듬해 초등 1~2학년 수준 수학을 쉽고 재미있는 게임으로 배우는 앱 ‘토도수학’을 출시했다. 이 앱은 20국 애플 앱스토어 교육 부문에서 다운로드 1위를 했다. 이 대표는 “게임 앱은 1등을 하기 위해 달려드는 이용자만 보고 만들어도 돈을 벌지만, 교육 앱은 경쟁서 뒤처지는 아이들을 내버려둘 수 없다”며 “이 아이들을 끌고 가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만든 프로그램을 장애가 있는 아들이 직접 쓰면서 개념을 차근차근 익히고 수학 문제도 척척 푸는 모습에 이 대표는 뿌듯함을 느꼈다.

도전은 또다른 도전으로 이어졌다. 2014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유네스코, 엑스프라이즈재단이 상금 1500만달러(약 212억원)를 걸고 문맹 아이들에게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 대회’를 연다고 발표했다. 전기도 학교도 없는 탄자니아 시골 마을에 태블릿을 나눠주고 7~10세 아이들이 15개월 동안 자발적으로 문해·수리 프로그램을 쓰게 한 뒤 가장 높은 학습 성과를 증명하는 팀이 우승하는 대회였다. 2019년까지 꼬박 5년을 매달려야 하는데 실패 확률은 80%에 달해 직원들 모두가 반대했지만, 결국 에누마는 우승했다.

이 대표는 “챗GPT가 올해 치러진 수능 국어를 풀었더니 한 문제 빼고 다 맞혀 1등급을 받았다. 작년엔 4등급이었으니 인간보다 훨씬 빨리 배운다”며 “이처럼 객관식 잘 푸는 능력은 AI한테 시키면 된다. 지금 우리가 절실하게 갖춰야 할 능력은 주어진 정보에서 참과 거짓을 가려낼 줄 아는 안목과 지혜”라고 강조했다.

에누마는 출판사 와이비엠과 손잡고 내년 3월부터 초·중·고교에서 쓰일 AI 디지털 교과서를 개발해 최근 검정 심사에 최종 합격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미국 등 선진국은 학교에서 AI를 적극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디지털에 익숙하도록 이끈다”면서 “우리도 아이들이 디지털을 ‘생산 도구’로 활용해 전 세계 인재들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도록 디지털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김경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