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사태 이틀 뒤인 지난 5일 책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의 저자인 김선재 진보당 대전시당 부위원장,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의 임재근 교육연구소장과 정성일 기획홍보팀장이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의 장태완 장군의 묘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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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3일 밤 윤석열은 내란에 실패했으나, 45년 전 12월12일 전두환은 내란에 성공했다.
전두환 곁에도 내란을 도운 협력자들이 있었다. 내란을 함께 일으킨 자, 그것에 협력하거나 방조한 자, 반란군 앞에 비겁하고 무기력했던 자 모두 독재자 전두환의 도래에 일조했다.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으나 실패한 군인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거나 비참하게 죽었다. 지금, 그 처단되지 않은 반란군과 그들을 막는 데 실패한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국립현충원에 나란히 함께 묻혀 있다.
현충원 모셔진, 내란 승리의 역사
“반란군이 죽어서도 장태완 장군을 도청하고 있는 것만 같다.”
12·3 내란사태 이틀 뒤인 지난 5일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을 찾은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의 저자들(김선재 진보당 대전시당 부위원장,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의 임재근 교육연구소장과 정성일 기획홍보팀장)은 장태완 장군의 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 신군부에 끝까지 맞섰던 장 장군의 묘 왼쪽 바로 옆에는 진압군을 도청한 내란의 숨은 주역 정도영(육사 14기)의 묘가 있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밑의 보안처장이었던 정도영은 반란 과정에서 진압군 지휘관 간의 통화를 감청해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내란 성공 뒤 별을 달고 예편한 그는 사회정화위원장, 성업공사(현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 한국자유총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1993년 반란죄 혐의로 장태완 장군 등에게 고발당하자 맞고소했다. 신군부 반란의 핵심이었으나 재판에 기소되지 않은 그는 2010년 7월24일 사망하고 ‘별’(장군)이란 이유만으로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정우성 배우가 연기한 이태신의 실제 모델인 장태완 장군은 내란 뒤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45일간 고문 조사를 받고 강제 예편됐다. 1980년 2월 감옥에서 나온 장 장군은 가택 연금돼 보안사령부의 감시를 받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고향의 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다. 1981년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한 ‘공부 잘하는’ 그의 아들은 1982년 실종돼 한달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장 장군은 심근경색과 폐암 등으로 고생하다 2010년 7월 숨졌고, 운명의 장난처럼 이틀 전 사망한 정도영 옆에 나란히 묻혔다. 장 장군의 아내 이병호 여사는 아들 성호씨의 서른번째 제삿날인 2012년 1월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 장군처럼 반란군에 끝까지 저항했던 김진기 당시 육군본부 헌병감(‘서울의 봄’에서 김성균 배우가 연기한 김준엽의 실제 인물) 역시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안장돼 있다.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서 내란 범죄자들의 묘와 장태완·김진기 장군의 묘를 한데 응시하며 정성일 팀장은 “12·12 반란에 협조한 자들은 하나회에 충성하거나 본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군인으로서 사명을 저버리고 반란에 나섰다. 반란 이후에는 고속 승진해 권세를 누렸다. 그런 자들이 무죄를 받거나 재판을 받지 않아 죽어서도 현충원에 편히 누워 있다”며 “과거의 우리는 반란군 내란 범죄자들을 조금도 처단하지 못했다. 2024년 12월, 지금의 역사는 ‘반란군 승리’의 결과물이고, 그 증거가 대전현충원에 고스란히 모셔져 있다”고 말했다.
양지바른 현충원에 묻힌 12·12 반란군들
1979년 12월14일 내란에 성공한 군사반란의 주역 34명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촬영 장소는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령부 앞마당이었다. 그날 참석 못 한 장군 계급이었던 박준병·남웅종·백운택은 나중에 합성까지 해 이 ‘개국공신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 중 2명은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이 됐고, 6명은 국회의원이 됐으며, 14명은 군 최고 계급인 4성 장군이 됐다. 군복을 벗은 뒤에도 장관, 공사 이사장을 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내란의 영광’은 죽어서도 이어졌다. 현재 숨진 것으로 확인된 18명 중 13명이 국립현충원에 묻혔고, 그중 10명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전두환의 선배로 내란에 가담한 뒤 전두환·노태우(육사 11기)와 6인위원회를 꾸려 신군부 기초를 만든 차규헌(8기)·황영시(10기)·유학성(8기)·김윤호(10기) 등 4명 중 유학성과 김윤호도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내란 뒤 초대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으로 임명된 유학성은 이후 12·13·14대 국회의원을 했다. 1995년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반란죄·내란죄로 1·2심에서 징역형(1심 8년, 2심 6년)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 판결 전인 1997년 4월 병보석 상태로 사망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내란·반란죄로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이 확정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고 규정하지만, 유학성은 상고 뒤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죽었다는 이유로 현충원에 묻혔다. 그는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도 가장 높고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누워 있고, 2005년 현충일을 앞두고 대전현충원을 찾은 전두환은 내란 공범인 선배의 묘를 참배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보병학교장이었던 김윤호 역시 하나회 핵심 인물로 내란에 동참한 인물이다. ‘미국통’으로 내란 뒤 정국 수습에 일조한 그는 1년 되지 않아 별 4개를 달고 또 1년 만에 국군 의전 서열 1위인 합동참모의장에 올랐다. 예편 뒤에도 대한석탄공사·한국가스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다 12·12 관련 재판을 받지 않은 채 2013년 1월 숨져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묻혔다.
보안사 소속이 아니었으나 자신의 상관이 아닌 전두환을 따르며 내란을 성공시킨 자들도 현충원에 있다. 당시 20사단장이었던 박준병(육사 12기)은 대정부 전복 시도를 진압하는 본래 임무와 반대로 반란군 편에서 내란에 가담했고, 1980년 5월엔 5천여명의 군인을 투입해 광주 시민들을 죽였다.
이후 노태우로부터 보안사령관을 넘겨받은 박준병은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주도한 신군부의 핵심 인물이지만, 12·12 당시 20사단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란죄·내란죄로 기소된 이들 중 유일하게 무죄를 받아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편히 잠들었다.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안장된 김기택(11기)은 12·12 당시 반란군 진압에 앞장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육군종합학교 11기) 휘하 참모장이었다. 반란 초기엔 반란군 진압을 도왔던 김기택은 전세가 전두환 쪽으로 기울자 상관을 배신하고 반란군인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 길(행주대교)을 터주며 내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나회도 아닌 김기택은 이 공으로 내란 성공 기념촬영에 함께했고, 이후 별을 달고 국방대학원장, 태평양건설(현 한화건설) 사장, 제일화재해상보험 대표이사까지 거쳤다. 군사반란 주범에서 제외돼 기소조차 되지 않은 덕분에 2010년 6월18일 사망하자 바로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다른 내란범 중에서도 송응섭·김택수(장군2묘역)는 대전현충원에, 백운택은 서울현충원(장군1묘역)에 안장돼 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12·3 내란사태 이틀 뒤인 지난 5일 책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의 저자인 김선재 진보당 대전시당 부위원장,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의 임재근 교육연구소장과 정성일 기획홍보팀장이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의 장태완 장군과 반란군 정도영의 묘 앞에서 12·12 군사반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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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나란히 안장된 장태완 장군과 반란군 정도영의 묘 모습. 최예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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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나란히 안장된 장태완 장군과 반란군 정도영의 묘 모습. 최예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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