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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목)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그날 밤 내란이 성공했다면…현충원에 묻힌 내란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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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내란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국회에 진입한 무장 군인들이 상관의 명령에 순응해 의원들을 끌어내고 막아서는 시민들을 폭력으로 제압했다면, 지금 어떤 시간 속에 살고 있을까. 우리는 그 끔찍한 가정의 공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상을 버티고 있다.



2024년 12월 윤석열은 실패했으나, 45년 전 12월12일 전두환은 내란에 성공했다. 전두환 곁에도 내란을 도운 협력자들이 있었다. 내란을 함께 일으킨 자, 그것에 협력하거나 방조한 자, 반란군 앞에 비겁하고 무기력했던 자 모두 독재자 전두환의 도래에 일조했다.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으나 실패한 군인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거나 비참하게 죽었다. 지금, 그 처단되지 않은 반란군과 그들을 막는 데 실패한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국립현충원에 나란히 함께 묻혀 있다.





현충원 모셔진, 내란 승리의 역사





“반란군이 죽어서도 장태완 장군을 도청하고 있는 것만 같다.”



12·3 내란사태 이틀 뒤인 지난 5일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을 찾은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의 저자들(김선재 진보당 대전시당 부위원장,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의 임재근 교육연구소장과 정성일 기획홍보팀장)은 장태완 장군의 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 신군부에 끝까지 맞섰던 장 장군의 묘 왼쪽 바로 옆에는 진압군을 도청한 내란의 숨은 주역 정도영(14기)의 묘가 있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밑의 보안처장이었던 정도영은 반란 과정에서 진압군 지휘관 간의 통화를 감청해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내란 성공 뒤 별을 달고 예편한 그는 사회정화위원장, 성업공사(현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 한국자유총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1993년 반란죄 혐의로 장태완 장군 등에게 고발당하자 맞고소했다. 신군부 반란의 핵심이었으나 재판에 기소되지 않은 정도영은 2010년 7월24일 사망해 ‘별(장군)’이란 이유만으로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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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전사’에 실린 정도영(맨 위 가운데) 모습. 이 기록에서 정도영은 ‘12·12 난국 극복의 참여자’로 당시 준장인 최세창 다음으로 등장한다. 책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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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봄’에서 정우성 배우가 연기한 이태신의 실제 모델인 장태완 장군은 내란 뒤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45일간 고문 조사를 받고 강제 예편됐다. 1980년 2월 감옥에서 나온 장 장군은 가택 연금돼 보안사령부의 감시를 받았는데, 내란 뒤 아들 소식을 들은 고향의 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다. 1981년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한 ‘공부 잘하는’ 그의 아들은 1982년 1월12일 실종돼 약 한 달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장 장군은 심근경색과 폐암 등으로 고생하다 2010년 7월26일 숨졌고, 운명의 장난처럼 이틀 전 사망한 정도영 옆에 나란히 묻혔다. 장 장군의 아내 이병호 여사는 아들 성호씨의 서른번째 제삿날인 2012년 1월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12군사반란 당시 장태완 장군처럼 반란군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김진기 당시 육군본부 헌병감(‘서울의봄’에서 김성균 배우가 연기한 김준엽의 실제 모델) 역시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안장돼 있다. 1980년 1월 군을 떠난 그는 농촌에 살며 농사를 짓다, 반란군이 득세하는 꼴이 보기 싫어 보문도로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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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서 정우성·김선균 배우가 연기한 진압군 이태완·김준엽의 실제 모델인 장태완(위)·김진기(아래) 장군과 그들이 있는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의 묘 모습. 책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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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김진기 장군과 함께 반란군에 맞섰던 정병주 육군특수사령관(육사 9기)은 서울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그는 1987년 11월 김진기 장군과 함께 신군부의 하극상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몇 개월 뒤인 1988년 10월 실종됐다가 이듬해 3월 경기도 한 야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장태완 장군을 도와 반란을 막으려 하다 내란 뒤 강제 예편된 이건영 제3야전군사령관도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상관인 정병주 장군을 끝까지 지키다 전사한 김오랑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역시 서울현충원에 있다. 아들의 죽음에 부모님 모두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남편 사망 소식에 실명한 부인 백영옥씨는 1991년 6월28일 변사체로 발견돼 실족사 처리됐다.



박정희 사망 뒤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반란군에게 납치돼 고초를 겪다가 내란방조죄(김재규의 박정희 시해를 방조한 혐의)로 10년 형을 선고받은 뒤 이등병으로 강등돼 불명예 전역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처럼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과 하나회를 견제하기 위해 유일한 육군종합학교 출신 장군으로 강직한 성품의 장태완 소장에게 수도경비사령부를 맡긴 인물이다. 1997년 18년 만에 재심으로 내란방조죄 무죄를 선고받은 그는 반란군 최고참인 유학성과 함께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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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사태 이틀 뒤인 지난 5일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을 찾은 김선재 진보당 대전시당 부위원장,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의 임재근 교육연구소장과 정성일 기획홍보팀장이 반란군 정도영과 반란군 진압에 앞장선 장태완 장군의 묘 앞에서 12·12 군사반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대전현충원을 찾은 3명은 지난 10월 공저로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를 펴냈다. 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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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서 내란 범죄자들의 묘와 장태완·김진기 장군의 묘를 한 데 응시하며 정성일 팀장은 “12·12 반란에 협조한 자들은 하나회에 충성하거나 본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군인으로서 사명을 저버리고 반란에 나섰다. 반란 이후에는 고속 승진해 권세를 누렸다. 그런 자들이 무죄를 받거나 재판을 받지 않아 죽어서도 현충원에 편히 누워있다”며 “과거의 우리는 반란군 내란 범죄자들을 조금도 처단하지 못했다. 2024년 12월, 지금의 역사는 ‘반란군 승리’의 결과물이고, 그 증거가 대전현충원에 고스란히 모셔져 있다”고 말했다.





양지바른 현충원에 묻힌 12.12 반란군들





1979년 12월14일 내란에 성공한 군사반란의 주역인 34명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촬영 장소는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령부 앞마당이었다. 그날 참석 못 한 장군 계급이었던 박준병·남웅종·백운택은 나중에 합성까지 해 이 ‘개국공신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 중 2명은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이 됐고, 6명은 국회의원이 됐으며, 14명은 군 최고 계급인 4성 장군이 됐다. 군복을 벗은 뒤에도 장관·공사 이사장을 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내란의 영광’은 죽어서도 이어졌다. 현재 숨진 것으로 확인된 18명 중 13명이 국립묘지에 묻혔고, 그중 10명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전두환의 선배로 내란에 가담한 뒤 전두환·노태우(육사 11기)와 6인위원회를 꾸려 신군부 기초를 만든 차규헌(8기)·황영시(10기)·유학성(8기)·김윤호(10기) 등 4명 중 유학성과 김윤호도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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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서 고 염동헌 배우가 연기한 배송학의 실제 모델 유학성과 그의 묘. 전두환의 선배로 하나회 주축인 유학성은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도 가장 높고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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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뒤 초대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으로 임명된 된 유학성은 이후 12·13·14대 국회의원을 했다. 1995년 12·12군사반란과 5.17내란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반란죄·내란죄로 1·2심에서 징역형(1심 8년, 2심 6년)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 판결 전인 1997년 4월 병보석 상태로 사망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내란·반란죄로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이 확정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고 규정하지만, 유학성은 상고 뒤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현충원에 묻혔다. 그는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도 가장 높고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누워있다. 2005년 현충일을 앞두고 대전을 찾은 전두환은 내란 공범인 선배의 묘를 참배했다.



12·12군사반란 당시 육군보병학교장이었던 김윤호 역시 하나회 핵심 인물로 내란에 동참한 인물이다. ‘미국통’으로 내란 뒤 정국 수습에 일조한 그는 1년도 되지 않아 별 4개를 달고 또 1년 만에 국군 의전 서열 1위인 합동참모의장에 올랐다. 예편 뒤에도 대한석탄공사·한국가스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다 12·12 관련 재판을 받지 않은 채 2013년 1월 숨졌다. 김윤호도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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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1일 대전현충원을 찾은 12·12 군사반란 수괴 전두환이 육사 선배이자 내란 공범인 유학성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정성일 제공


보안사 소속이 아니었으나 자신의 상관이 아닌 전두환을 따르며 내란을 성공시킨 자들도 현충원에 있다. 당시 20사단장이었던 박준병(육사 12기)은 대정부 전복 시도를 진압하는 본래 임무와 반대로 반란군 편에서 내란에 가담했고, 1980년 5월엔 5천여명의 군인을 투입해 광주 시민들을 죽였다. 이후 노태우에게 보안사령관을 넘겨받은 박준병은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주도한 신군부의 핵심 인물이지만, 12.12 당시 20사단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란죄·내란죄로 기소된 이들 중 유일하게 무죄를 받아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편히 잠들었다.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안장된 김기택(11기)은 12.12 당시 반란군 진압에 앞장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육군종합학교 11기) 휘하 참모장이었다. 반란 초기엔 반란군 진압을 도왔던 김기택은 전세가 전두환 쪽으로 기울자 상관을 배신하고 반란군인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 길(행주대교)을 터주며 내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나회도 아닌 김기택은 이 공으로 내란 성공 기념촬영에 함께했고, 이후 별을 달아 국방대학원장, 태평양건설(현 한화건설) 사장, 제일화재해상보험 대표이사까지 거쳤다. 군사반란 주범에서 제외돼 기소조차 되지 않은 덕분에 2010년 6월18일 사망하자 바로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다른 내란범 중에서도 송응섭·김택수(장군2묘역)은 대전현충원에, 백운택은 서울현충원(장군1묘역)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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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서 김의성 배우가 연기한 오국상의 실제 모델인 노재현 전 국방부 장관과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있는 그의 묘 모습. 책 ‘대전현충원에 묻인 이야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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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진에는 없으나 내란의 일등 공신인 자들도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서 편히 쉬고 있다. 영화에서 김의성 배우가 연기한 오국상의 실제 인물인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육사 3기)이다. 12·12 당시 그는 이웃인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가족을 모두 데리고 도망쳤다. 그날 밤 전두환의 반란군과 장태완·이건영의 진입군 모두 국방부 장관인 그를 애타게 찾았으나 육군본부 비(B)-2 벙커와 한미연합사령부를 오가며 제 살길을 찾았다. 결국 국방부에서 전두환의 제1공수특전여단에 붙잡힌 그가 진압군인 장태완 장군에게 단호히 내린 마지막 명령은 “가만히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절대 충돌하지 마!”였다. 그는 내란 뒤 바로 장관에서 내려왔지만, 반란군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백선엽에 이어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을 했고,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도 역임한 뒤 2019년 9월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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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발간된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책 표지. 도서출판 ‘문화의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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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반란 당시 육군참모차장이었던 윤성민은 납치된 육군참모총장을 대신해 진압군을 지휘해야 했으나, 반란군의 신사협정에 속아 마지막 희망인 제9공수특전여단을 되돌려 보낸 인물이다. 그는 다른 진압군과는 달리 이후 더 승승장구했다. 반란 직후 별을 하나 더 달아 대장으로 진급했고, 1981년 합동참모의장을 거쳐 1982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한국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방직협회장까지 한 뒤 2017년 사망해 역시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안장됐다. 1996년 12·12 군사반란 조사가 시작되자 노재현과 윤성민은 반란군은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에 나서 전두환 신군부의 하극상을 증언하며 내란의 책임에서 벗어났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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