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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금)

370년 씨간장, 파라과이에 가다 [진옥섭 풍류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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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호텔에서 기순도 명인과 아들 고훈국씨가 씨간장을 항아리에 담았다. ‘장 담그기 문화’가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될 때 취재진 앞에 내놓을 것이다. 그러면 작은 항아리가 ‘이것이 370년 된 씨간장이다’ 말없이 발언을 할 것이다. 행장을 마치니 한국시각 3일 오후 8시30분이다. 앞으로 2시간 후, 정치와 치안이 불안하다는 남미에서 고국의 비상계엄 선포를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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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식품명인 제35호 기순도 명인. 제사를 받드는 봉제사(奉祭祀)와 손님을 맞는 접빈객(接賓客) 여섯 글자를 통해 종가음식 28종 395품목을 보유한 장흥 고씨 양진재 종가의 10대 종부.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30년 전, 치기 어린 사직서를 썼다. 사유는 “한번 피 맛을 본 들짐승은 다시는 집짐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방정을 떨고 내려간 경남 고성에서 탈춤과 술로 지냈다. 하여 과음으로 부대끼던 어느 날, 마주친 동네 할머니에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할머니 몸이 뭐예요?” 아차! 스스로 놀란 순간, 할머니는 태연히 “장독대지. 위장, 간장, 대장, ‘장’자만 죄 모아놨으니 장독대”라 했다. 순간 번개가 머리를 통과해가고 있었다. 아이 낳고 금줄을 걸었고, 장 담그고 금줄을 걸었던 어미였다. 그런 어미이기에 답할 수 있는 정갈한 말, 장독대였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린 그 말이, 내 몸을 헹궈냈다.



2024년 4월,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의 장독대를 보고 있었다. 1200여개의 항아리가 저마다 시간을 품고 영글고 있었다. 주인장은 봄볕을 느긋하게 쬐고 있는 장독을 보살폈다. 송홧가루가 떨어지면 장독을 열어 담는다. 그리고 황사가 오는 날엔 서둘러 닫는다. 원래 30여개의 항아리가 있던 종가의 장독대였다. 웅숭깊은 맛을 알아본 사람들이 요청하여 판매를 시작하였다. 점차 백화점과 레스토랑, 해외로 나갔으니, 해마다 항아리가 늘어 마당을 가득 채웠다.



시간의 주인 기순도(1949년생) 명인, 장흥 고씨 양진재(養眞齋) 종가의 10대 종부다. 제사를 받드는 봉제사(奉祭祀)와 손님을 맞는 접빈객(接賓客)으로 다듬어진 빈틈없는 자태였다. 대를 물린 가문의 맛을 내지만 자신만의 맛도 꺼내 놓는다. 장김치는 젓갈 없이 장으로만 담근 가문의 김치다. 아삭아삭한 게,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도 안심할 ‘비건 김치’다. 딸기로 만든 딸기고추장이 제 맛이다. 어금니에 딸기 씨가 톡! 터지는 쾌감까지 맛볼 수 있다. 친정아버지가 아들용으로 준비한 이름을 받은 소녀 기순도. 그래서 군대 영장을 받고 군청에 해명하러 갔던 아가씨 기순도. 지금은 종가음식 28종 395품목을 보유한, 온고지신으로 솟은 맛의 섬 기순도 명인이다.



창평 옆은 시인의 길인 가사문학면이다.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더불어 ‘식영정 사선(四仙)’으로 불리던 제봉 고경명(1533~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00 의병을 일으켜 추성관(현 담양동초등학교)에서 출정하였다. 담양회맹군(潭陽會盟軍)은 전주와 여산을 거쳐 전진했고,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기 위해 금산성을 공격했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차남 고인후(1561~1592)와 함께 순절한다. 비록 패했으나 고경명의 의기로 호남의 의병이 또다시 봉기했고, 끝내 곡창 호남을 지켜 임란의 전세를 뒤집었다.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의 증손 고세태(1645~1713)가 양진재 종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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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26일 담양군문화재단과 함께한 ‘장 담그기 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기원 행사. 양진재 종가의 방식으로 시연한 기순도 명인(왼쪽부터), 조교를 담당한 딸 고민견 전수자, 체험하는 시인 박용재.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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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담양군문화재단에서 ‘장 담그기 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기원제를 했다. 기순도 명인의 주도 하에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물을 부었다. 그리고 새끼줄에 숯과 고추를 끼워 금줄을 쳤다. 장 담그기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오로지 물과 소금과 콩의 순수한 만남이다. 더 첨가해야 하는 것은 시간과 정성이다. 항아리 안에서 세균과 효모와 곰팡이가 오묘하게 발효한다. 때가 되면 소금물과 메주를 분리하는 ‘장 가르기’를 한다.



기억하는가, 예전 우리가 혀 빼물고 발음 연습하던 구절. “간장공장 공장장은 강 공장장이고, 된장공장 공장장은 장 공장장이다.” ‘장 가르기’를 이해하면, 간장공장과 된장공장 사장이 따로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갔다가 국물을 걸러내면 간장이 되고, 남은 메주는 된장이 된다. 공장이 망할 요량이 아닌 바에는 둘을 겸해야 한다. 콩기름을 짜낸 탈지대두에 화학의 힘을 섞은 제품이면 몰라도, 전통 장이라면 함께해야 한다.



양진재 종가의 장은 소금물과 메주의 합숙 기간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청장은 40일에서 60일을 지내 아직 색이 맑다. 중장은 60일에서 90일을 지내 조금 색이 있다. 그리고 진장은 365일을 꼬박 지내고 나서 거른다. 이쯤이면 메주는 거의 죽이 되어 있다. 남정네들 좋아하는 청주를 거르듯, 용수를 통해 간장을 떠낸다. 거기에 대대로 내려오는 씨간장을 넣어 4년을 더 숙성한다. 도합 5년의 시간과 공정을 들이니 색도 맛도 진하다. 기순도 명인은 이 진장으로 전통식품명인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씨간장은 ‘신(信)의 물방울’이다. 종부에서 종부로 대물림된 간장으로 명절과 제사에만 쓴다. 사용한 양만큼 진장을 섞는 ‘덧장’으로 보강한다. 종가의 종묘사직인 씨간장 항아리는 전쟁이나 난리 때 위태롭다. 또 지주와 소작인처럼, 사람 간 갈등도 큰 문제다. 기순도 명인이 씨간장을 무사히 물려받은 것은 “문중이 남들을 홀대한 적이 없어서”였다. 양진재 가문의 씨간장은 지역의 존경과 신뢰로 370년을 이어왔다.



2004년 11월29일, ‘신(信)의 물방울’을 받들고 파라과이로 출발했다. 파리에서 1박하고, 브라질 상파울루를 거쳐 파라과이 국경을 육로로 지났다. 이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접경지가 아마존 상류지역과 함께 고추의 원산지로 지목되는 곳이다. 유전과학의 진보로 변이 파악이 상세해진 덕분이다. ‘고맙다! 이 땅이여, 고추가 돋아나서.’ 우리는 아들을 낳은 금줄에 고추를 걸었고, 장을 담근 금줄에 고추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독에 넣어 고추장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매운 정체성을 만들고, 케이(K)-푸드 전성시대를 만든 공신이 “고추, 바로 너”다.



지난 3일 파라과이 아순시온, 신새벽 구글 지도로 예습해 둔 길을 찾아 나섰다. 대통령궁 뒤 낮은 빈민촌을 가로지르니 파라과이강이다. 강 건너 아르헨티나를 보며 유투브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틀었다. ‘강이여, 내 연설을 들어라.’ 콩의 원산지는 만주와 한반도다. 두 땅을 가르는 두만강(豆滿江)은 ‘콩 두(豆)’자를 쓰고 있다. 세계 콩 수출 1위는 지나온 브라질, 3위는 강 건너 아르헨티나, 6위는 여기 파라과이다. 아는지 모르지만, 너희 남미 콩 유전자의 대부분이 한국 콩에서 연유했다. 알아두면 좋은 것이, 너희가 배우고픈 케이팝 속 한국어는 발음이 또렷해야 한다. 영어처럼 연음으로 얼렁뚱땅 뭉개지 말라. 그래서 우리는 혀를 빼 연습한단다. “저기 저 콩깍지는 깐 콩깍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 여기서도 콩콩! 하며 콩의 종주국임을 밝히고 있음을 너희는 필히 알라.



호텔로 돌아갈 때, 날이 밝아 마을의 가난이 빤히 보였다. 망고나무가 감나무처럼 열매를 달고 단내를 풍겼다. 여기 ‘쌀 증산 320만석 돌파’ 같은 포스터가 붙으면 1970년 중반의 담양 땅이다. 동네의 공동 라디오인 스피커에서 나오는 ‘눈물 젖은 두만강’은 바람이 내 쪽으로 불면 들리고, 저쪽으로 불면 안 들렸다. 김정구가 1938년 취입했는데, 라디오 ‘김삿갓 방랑기’의 주제가로 역주행 중이었다. 콩은 논둑이나 밭 어디서나 콩이 무성했다. 중국과 한국은 콩 생산국 1위와 2위였다. 지금은 두 나라 모두 대표적인 콩 수입국이 되었다. 당시 심혈을 기울인 벼농사, 지금은 과잉 생산되는 쌀이 큰 문제다. 파라과이에 동행한 이병노 담양군수는 고수익 작물로 전환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한다.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콩의 전성시대가 다시 오는 것도 해법 중 하나가 된다.



오전 8시. 호텔에서 기순도 명인과 아들 고훈국(고려전통식품 대표)씨가 씨간장을 항아리에 담았다. ‘장 담그기 문화’가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될 때 취재진 앞에 내놓을 것이다. 그러면 작은 항아리가 ‘이것이 370년 된 씨간장이다’ 말없이 발언을 할 것이다. 행장을 마치니 현지시각 3일 오전 8시30분, 한국시각 3일 오후 8시30분이다. 앞으로 2시간 후, 정치와 치안이 불안하다는 남미에서 고국의 비상계엄 선포를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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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파라과이에서 ‘장 담그기 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기념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송인헌 국가유산청 과장, 고훈국 고려전통식품 대표, 이규민 한식진흥원 이사장, 최응천 국가유산청장, 기순도 명인, 윤찬식 주파라과이 대사, 이병노 담양군수, 진옥섭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한식진흥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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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함과 공포, 긴장과 허탈 속에서 진행된, 인류무형문화유산 ‘장 담그기 문화’ 등재. 그 사연은 다음 회에 전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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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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