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3 (금)

[허지원의 마음상담소] 분노는 나의 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심리치료 중 자신이 겪은 부당한 일을 말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토해내듯 분노하는 내담자를 보면, 마음 한 켠으로는 조용한 안심이 몰려옵니다. ‘아, 화를 낼 줄 아는 분이구나. 참 고맙다. 좋다.’

심리학적으로 분노는 ‘목표로 향하는 도중에 방해받거나 부당한 일을 겪을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으로 정의됩니다. 우리 분노는 매우 민감한 레이더입니다. 화가 너무나 날 때, 바로 그때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지 들여다보세요. 나는 단지 이런 것을 원했어. 나는 실은 이런 사람이고 싶었어. 내가 생각하는 관계란 이런 것이야. 내가 믿는 세상은 이런 거야. 내가 화가 치민다면, 분명 그때 나의 존엄성과 소망이 침해된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분노는 무엇에 접근하려는 감정

혐오나 공포, 적개심과는 달라

화날 때 객관적으로 상황 보기도

정당한 분노는 응원받을 수 있어

중앙일보

실제로 분노는 어떤 것에 ‘접근하려는’ 감정으로 분류됩니다. 어떤 것에서 ‘멀어지려는’ 감정인 혐오, 공포와 분명히 구분됩니다. 분노는 나의 목표를 또렷하게 수면 위로 드러내어 주고 그곳으로 향하도록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화를 낼법한 상황에서도 손사래를 치며 물러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거잖아요. 이 정도에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게 맞나 싶어요. 화를 낸다고 뭐 바뀔 것 같지도 않고.’ 분노를 느끼지 않기로 택한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억제하고, 무의식적으로 한 번 더 억압합니다. 억눌린 분노로 어느 순간부터는 몸 이곳저곳에서 통증 반응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역시도 혼자 감내하려 합니다.

크게는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는 이 문제 상황을 감당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해도 소용없다는 무력감과 희망이 없다는 느낌.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상황에 오랜 기간 학대받으며 우울과 비관주의가 내게 왜곡된 렌즈를 씌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릅니다. 몇 년 전이라면 모를까, 그 렌즈는 지금의 당신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

두번째는 부정적 상황에서 분노보다 불안과 혐오가 더 빨리 올라오는 경우입니다. 회피하고 증오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세상을 전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도처에 모두가 오물이라는 느낌이 자꾸 들어 세상과 멀어지고 있다면, 이건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정말 피해야 하는 오물이 있기도 하겠지만, 미래의 나를 포함해 다른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미리 치워두면 좋을 오물도 분명 있습니다. ‘내가 왜?’ 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이야말로 누구보다 잣대가 엄격하고 혐오하기를 싫어하니까요. 그리고 오물에 가까이 가보니 ‘막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경험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오물을 치우려 할 때, 다른 사람들도 같이 삽을 들고 나를 도우러 뛰어오는 경험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염세주의를 버리고, 다시 세상에 접근해 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분노의 목소리를 내면 결국 큰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 파국화 등의 인지적 왜곡도 나의 정당한 분노를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분노하는 방식은 파괴적인 반응이 분명 아닐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신해 노여워할 줄 아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어느 방향으로 어느 만큼 분노해야 하는지를 알고 화를 낼 것입니다.

실제로 파괴적인 적개심과 정당한 분노는 다릅니다. 분노는 누군가를 해치거나 절망하게 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연구에 따르면 화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분석적,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또렷해집니다. 얼마 전 발표된 한 연구에서도 화나 있는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들을 더 잘 풀어나가고 미래를 대비하는 행동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노여워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더 멀리까지를 바라보고, 더 많은 사람을 살피고, 마침내 연결됩니다.

당신의 분노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회피와 혐오, 증오가 문제입니다. 분노에 대한 그간의 잘못된 믿음이 문제입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불의가 문제입니다. 노여워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 나의 힘을 믿는다는 것. 다다라야 할 지점이 있다는 것. 연결되고 가까워지고 싶다는 것.

귀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마음껏 노여워하세요. 당신이 정당하게 분노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제 지켜보세요. 다른 사람과 세상을 좀 더 믿어보세요. 나의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 응원군이 도착합니다. 내가 지켜낸 나의 존엄성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름 모를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이 연결되어 다시 당신을 지키러 옵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