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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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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준의 마음 쓰기] (17)

첫눈 내리던 날 우리는 이른 점심에 만났습니다. 모처럼 쉬는 날이 겹친다는 사실을 알고 오랜만에 맛난 음식을 먹으며 호사를 부리자며 도시 외곽의 식당에 모인 것입니다. 한낮부터 소고기 등심을 구웠고 반주도 곁들였습니다. 잔이 몇 순배 돌 때쯤 친구는 대뜸 “세상에 비밀과 거짓말로 성립되지 않는 관계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의도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세상의 어떤 사실은 거짓보다 못하다”며 눙치듯 답했습니다.

그날 자리에서 저와 친구는 그간 서로 알고 지내온 사람과 겪어온 시간을 되짚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 속에는 무수한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숱한 사실과 거짓보다 못한 사실이 한데 얽혀 있었을 것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첫눈은 어느새 폭설로 변해 있었습니다. 온갖 풍경을 숨기는 비밀처럼. 새하얀 거짓말처럼.

비밀과 거짓말은 생각보다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대부분의 비밀은 엄밀하게 말해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것이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어야 합니다. 인지조차 하지 못했으니 사실의 이면을 넘어 진실을 상상하거나 숨긴 이의 의도를 예측해보는 일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정한 비밀은 어떠한 의문이나 질문도 만들어내지 않는 법입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유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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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실을 낱낱이 알리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거짓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점심 뭐 먹었어?’라는 질문을 받은 뒤, 식당 테이블에 올랐던 모든 찬을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속이 안 좋아서 점심을 걸렀다고 하거나 일이 바빠서 못 먹었다고 말을 지어내야 거짓말이 됩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더라도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드러내는 경우 거짓말이 될 수 있습니다. 등심 이야기는 쏙 빼고 함께 곁들인 된장찌개와 무생채와 깻잎장아찌만 언급하는 것처럼.

얼마 전에는 평소 존경하는 선생님을 찾아 뵐 일이 있었습니다. 주로 해산물을 파는 단골 식당에서 만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선생님이 낯선 주소를 일러주었습니다. 도착해보니 댁 근처의 한 카페였습니다. 미리 와 계시던 선생님은 제가 도착하자 신난 표정으로 카페 사장님과 저를 번갈아 소개시켜주고는 이어서 직접 커피 원두까지 추천해주었습니다.

막 나온 커피의 김이 오르는 동안 선생님은 불쑥 고백을 해왔습니다. 올해 스스로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바로 이 카페를 찾은 것이라고. 요즘 살아가는 기쁨 중 하나가 바로 이 카페를 찾는 일이라고. 커피 맛이며 분위기며 실내에 흐르는 음악까지 하나같이 자기 취향이라고. 이 아늑한 장소와 시간을 뺏기기 싫어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산책 다녀오겠노라 말하고는 혼자서 이곳에 온다고. 그러니 이곳은 앞으로도 나와 너만 아는 비밀이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는 다시 비밀과 거짓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에게 그 카페에 관한 일은 비밀일까요, 거짓말일까요. 둘 다 맞을 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세상의 비밀과 거짓말이 이 정도의 소소함으로 이뤄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꿔보았습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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