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봤자 그의 독전 선언은 ‘눈먼 무사와 앉은뱅이 주술사’ 부부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고 마지막 발버둥이다.
그가 하려는 말은 뻔하다. 국민의힘에서 ‘배신자’를 청소하고 윤석열을 결사옹위할 체제를 구축하자. 윤석열을 지키는 아스팔트 보수세력을 동원하여 극우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자. 윤석열이 탄핵 법정 투쟁을 열심히 하겠으니 함께하자. 박근혜는 탄핵에 소극적으로 대처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국회의 탄핵 소추를 헌법재판소에서 뒤집겠다 독전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다 부질없는 짓이다. 비상계엄이 내려지자 득달같이 국회 앞으로 달려온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켰고, 매일 밤 전국을 밝힌 아름다움 불빛이 우리의 미래를 다시 밝혔다. 형형색색의 아이돌 응원 막대가 차가운 겨울밤을 따뜻하게 비추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상’이 떼창으로 울려 퍼질 때 사실 게임은 끝났다. 그들의 유쾌한 레지스탕스를 이길 총칼은 세상에 없다. 노소동락으로 사탕을 서로 건네고 ‘선결제’로 나누는 대동 세상을 누가 부술 수 있단 말인가? 윤석열이 손바닥에 쓴 임금 왕(王)자 부적이 ‘전국고삘이연합’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강아지발냄새연구회’ 깃발의 기운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우리는 더 지혜로워야 한다. ‘윤석열이 다시 온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선 지역, 계층, 나이, 성별을 망라하여 함께 불렀던 ‘다시 만난 세상’의 꿈을 소중하게 가꾸어가야 한다. 이제 이들에게 보여야 할 것이 있다. ‘그래 윤석열을 끌어내리고 어떤 세상을 만들려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탄핵 결정을 하고 나오는 길에 마이크를 잡더니 “지난 촛불혁명으로 세상이 바뀌는 줄 알았는데, 권력은 바뀌었으나 왜 나의 삶은 바뀐 게 없느냐? 이 사회는 왜 바뀌지 않았느냐? 라는 많은 국민의 따가운 질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대표의 말은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정치력’이 필요하다는 자기 선언으로 보인다.
탄핵의 장에서 함께하면서도, 서로 다른 꿈과 소망을 가진 다양하고 이질적인 집단의 민생 요구를 아울러 가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은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서둘러 시스템의 안정을 찾아 윤석열이 망가트린 외교·경제 문제를 안정화하고 동시에 사회적 의제 우선순위를 조정·합의해 나갈 수 있는 진짜 ‘정치’가 필요하다.
민주당의 짐이 무거워졌다. 윤석열 탄핵이 완성될 때까지 ‘최소강령 최대연합’이라는 전략기조를 유지해야 하지만 ‘탄핵을 넘어 사회대개혁으로’라는, 개혁 요구에도 부응해야 한다. 탄핵하고 나서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야 할 때가 급히 다가오고 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기후위기, 인구소멸, 디지털 대전환, 전쟁과 평화 등 지구적 과제는 물론 윤석열이 저지른 민주주의 후퇴, 민생 파탄 같은 현안 해결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다. 윤석열을 끌어내려도 지금 정치시스템을 그대로 두면 또 다른 윤석열이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에도 답을 해야 한다. 그러자면 헌법 개정을 포함한 정치개혁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다양해진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며 정치적 다양성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제도 실현은 윤석열 탄핵 열차가 닿아야 할 최종 역이라고도 하겠다.
지금은 윤석열 탄핵이 급선무이며 여기에 집중해야 하고, 이런 사회대개혁 논의는 한숨을 돌리고 나서 하자는 의견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둘을 서로 잘 결합하면 오히려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다고 본다.
사회대개혁 비전은 탄핵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힘을 내게 할 것이며, 그 힘은 사회대개혁 비전의 꿈을 더 영글게 하는 선순환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 윤석열 탄핵 광장이 ‘국가대개혁을 위한 사회적 협약’을 만드는 공론의 장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정치 연합의 틀’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민주당의 어깨가 무겁다.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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