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계엄이 만들어낸 위기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1952년 5월 27일 자정 주한미대리대사는 워싱턴의 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 전선이 아닌 부산 지역에 계엄이 선포되었고, 국회의원들 중 일부가 체포된 직후였다. “밴플리트(James A VanFleet·사진) 장군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논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자신과 클라크(Mark W Clark) 장군은 한국에서의 상황이 한국 정부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
1952년 부산 지역 계엄령 선포 때
트루먼 “한국전 희생 헛수고될 것”
5·16때도 “총구에서 나온 변화 거부”
유신때는 “1인 독재 정권으로 퇴보”
민주주의와 신인도 모두 큰 타격
공든 탑 붕괴 않도록 모든 준비 필요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아울러 “만약 다른 나라들에게 악영향을 미쳐 한국이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현 시점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할 때 그 필요성에 대해 보고받거나 자문을 받은 적이 없음을 지적했고, 자신이 아는 한 군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부산지역에 한국군을 추가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며, 현 시점에서 전투 병력을 투입하면 전선이 약화되고 그로 인해 생긴 허점을 적들이 어떻게든 이용할 것”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야당은 “무뢰배”
밴플리트 |
이승만 대통령은 내각에서 계엄령 선포를 결정했고, 자신이 이를 수락했다고 답했다. 도시가 불안정해졌기 때문에 부산까지 계엄령 선포지역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자신이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계엄을 미룰 수 없어서 참모총장의 공식명령서 없이 시행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자신을 반대하는 야당과 국회의원들을 비난했다. 한국을 구하기 위해 이들을 막아야 했고, ‘특단의 조치’가 불가피했다고 항변했다. 이에 주한미대리대사는 행정부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입법부의 회의를 가로막고 있는 점, 국회 내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체포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바로 이 점이 외부세계의 한국에 대한 지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외부세계의 민주적인 정부와 국민들은 이런 상황만 주목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두 달 뒤 대통령선거 후에 민주적 정부로 환원될 것이냐는 질문에 당황하면서 “두 달 동안 국회의 반역자 우두머리들이 모두 체포되어 격리될 것”이라고 답했다.
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 여의도 일대에서 중앙일보 호외가 배포되고 있다. [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대리대사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냈다. “이승만은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정말로 무뢰배들이라고 믿고 있으며, 오직 자신만이 무뢰배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자신의 권력 유지가 곧 국가의 번영이라고 등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승만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회복하려고 한다. (중략) 외국의 비판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국과 유엔이 자신의 행동을 가로막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게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루먼의 친서
일주일 후인 1952년 6월 2일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중략) 대한민국에서의 어떠한 변화도 합법적 과정으로 실행되지 않는다면, 지난 2년간 자유 세계와 한국인들의 피와 목숨의 희생이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위기를 종식시킬 수 있는 수용 가능하고 실행 가능한 방법을 찾기를 강력히 촉구합니다.”
민주주의는 반공의 가장 큰 자산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5월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버스에 탄 야당 의원들을 강제 연행했다. ‘부산 정치 파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 격분한 DJ는 정치를 결심하게 된다. [중앙포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61년 5월 16일 오전 11시 30분 주한 유엔군 사령관과 주한 미국 대리대사는 윤보선 대통령을 만났다. 군사정변이 발생한 날이었고, 박정희 소장이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고 간 직후였다. 이에 앞서 사령관과 대리대사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지지하며, 자신의 권한 하에 있는 모든 군인들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권한 밑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성명을 이미 발표한 상황이었다.
대리대사는 윤 대통령에게 “합헌정부를 지지하고 군사정변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먼저 언급했다. 그는 “총구에서 야기된 어떠한 변화도 한국의 민주적 기관의 생존에 있어서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아울러 “쿠데타는 또 다른 쿠데타를 불러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쿠데타의 성공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한국의 민주적 기관과 자유 선거로 수립된 정부는 북쪽의 공산주의 전체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가장 큰 재산”이라고 언급했다. 비록 남한에 부패 및 가난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 있지만, “그 약점이 무엇이든 현 정부가 몇 달 안되는 기간 동안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기간 동안 도달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경제적 개혁을 얻어냈다”고 말했다.
1972년의 유신
1961년 5월 16일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앞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계엄사령관 중장 장도영(왼쪽)과 부의장 소장 박정희가 나란히 서있다. [중앙포토]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유신 선포 후 일주일이 지난 1972년 10월 23일 주한미국대사는 국무무에 전문을 보냈다. 이미 주한미국대사는 박정희 정부의 계엄과 헌법개헌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달한 상황이었다. 23일의 전문은 계엄과 유신선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었다. “과거 헌법이 가졌던 견제와 균형의 제도가 사라진 1인 독재정권이 세워질 것이다. 이런 퇴보적 단계는 단순한 궁정 쿠데타나 권력장악보다 더 복잡한 것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과거 12년간 한국을 지배해 온 박정희와 그의 그룹은 오직 박정희만이 한국을 통치할 수 있고, 남북대화와 강대국 데탕트라는 이중의 과제와 불확실성 속에서 한국이 국가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런 박 대통령의 생각에 대해 미국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우리가 한국에서 27년간 주장하고 지지해왔던 정치철학으로부터 박정희가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약점이라면서 버린 시스템의 성격들, 예를 들면 행정부 권한의 제한, 대통령 직선에서 오는 반대와 불안정성 등은 우리가 장점으로 여기는 것들이다.” 그러면서도 한미동맹을 통한 안보공약과 주한미군의 존재 때문에 이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유신 계엄 이후 한미관계뿐만 아니라 한일관계도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1975년 남베트남 패망 이후 안보적 중요성이 강조되기도 했지만,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코리아게이트,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지상군 철수정책이 이어졌다. 결국 광범위한 국민들의 유신반대 움직임이 일어났고, 10.26 사건으로 유신은 몰락했다.
1980년과 1987년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항쟁 당시 거리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 왼쪽에 광주세무서가 불타고 있다. [연합뉴스] |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에 의한 계엄확대와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입장은 애매했다. 이란과 니카라과에서의 혁명에 이어 1979년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미국은 1972년처럼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던 듯 하다. 그러나 광주에 군대투입 승인 등 미국의 책임 문제가 이후 한국 내에서 제기되었다.
1987년 6월23일 개스턴 시거(Gaston J Sigur Jr.) 동아태 차관보가 방한했다. 그는 다음날 주한 미국대사와 함께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만났다. 그는 미국이 한국 상황에 개입할 의사는 없지만, ‘권력 이양은 반드시 평화적이어야 하며, 한국 정부는 보다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태우는 야당 지도자들과의 만남이 큰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의 개입이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군은 동원되지 않았다. 당시 정부가 군을 동원해 계엄 또는 위수령(2018년 폐지)을 반포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후에 더 많은 자료가 공개된다면 그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재발을 막기 위하여
이처럼 현대사를 통해 있었던 친위 군사정변과 계엄의 역사를 보면 그런 시도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는 물론 대외신인도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이 이룬 눈부신 소프트파워의 힘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또다시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국민들의 힘에 의해 민주주의는 다시 복원되어 가고 있다. 역사의 경험들을 보면서 왜 한국이 이런 일을 또 겪어야만 했는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선 확실한 진상규명과 처벌이 필요하다. 1987년은 물론 2017년의 계엄 계획은 진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민주화 과정에서 왜 헌법상 계엄에 대한 조항과 계엄법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을까 고민해야 한다. 87년 개헌은 80년 ‘서울의 봄’의 고민을 담지 못한 정치적 합의에 불과했던 것인가.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모든 준비를 진행해야 할 때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