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학계서 커지는 개헌론
◇문희상 전 국회의장
문희상 전 국회의장. |
지금이야말로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비극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에서 비롯됐다. 선거에서 이기는 세력이 모든 권력을 가져가는 승자 독식 구조가 모든 폐단을 만들어낸 것 아닌가. 대선에서 이긴 세력이 정치 보복을 하고, 진 세력은 이를 피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정권을 빼앗으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다 보니 정치가 동물 농장이 됐다.
정치를 복원하려면 여·야·정이 당장 개헌에 나서야 한다. 4년 대통령 중임제와 책임총리제를 결합한 권력 구조로 가야 한다. 방법은 이미 준비돼 있다. 역대 국회의장들이 개헌안을 만들었고, 여러 학자가 검토를 마쳤다. 정치학자의 85% 이상이 개헌을 주장한다. 이제 정치권의 결단만 남았다.
1987년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 도입 이후 성한 대통령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 문재인 전 대통령도 아슬아슬하다. 대통령제를 고치지 않는 한 미래의 대통령도 최악의 경우 윤석열 대통령처럼 될 수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설령 대통령이 되더라도 대통령제를 고치지 않는 한 숙명적으로 똑같이 될 수밖에 없다. 그걸 뻔히 알면서 왜 개헌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대표도 2022년 대선 때 김동연 경기지사와 함께 개헌에 동의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 과정에서 현직 국회의장(우원식 의원)이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국회의장과 여야 원내대표가 대통령 권한대행과 만나 멋지게 개헌에 합의하기 바란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일단 탄핵 정국을 마무리 짓고, 여·야·정이 함께 개헌하자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2026년 전국 동시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가 가능할 것이다.
개헌에 미온적인 여론도 이제는 넘어서야 하고 넘어설 수 있다. 국민은 대통령 권한을 분산한다고 하면 ‘국회의원들이 더 많이 해먹으려고 한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번 계엄 사태를 경험한 국민은 ‘대통령이 나라를 망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87년 체제에서 의회주의가 꽃핀 시기는 여소야대였던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다. 대통령이 항상 야당에 협조를 구했고, 야당이 나서서 국정을 선도했다. 대통령은 그 흐름을 따라갔는데 남북 기본 합의서, 유엔 동시 가입, 북방 외교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냈다. 그게 통합이고 민주주의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
정의화 전 국회의장./조선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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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난데없이 일으킨 12·3 비상계엄 사태는 ‘대통령제의 저주’라고 생각한다. 1987년 현행 헌법으로 개헌한 이후 선출된 5년 단임 대통령 8명 중 3명은 퇴임 후 구속됐다. 재임 중 국회에서 탄핵소추당한 대통령도 3명이다. 현행 대통령제에 문제가 있었고, 여기에 대통령 개인의 스타일 문제가 겹치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진작에 개헌을 해서 대통령제를 바꿨어야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대통령이 감옥에 가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현행 대통령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헌을 하지 않고 대통령제를 고수하는 한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4년 중임제든 5년 단임제든 대통령제는 이제 끝내야 하고, 준(準)내각제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 직선제로 뽑아 나라를 대표하도록 하고, 국회해산권도 줘서 권위도 살려주는 것이다. 대신에 내치(內治)에 해당하는 나라 살림은 총리가 맡아하고 장관도 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하는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이런 제도를 ‘반(半)대통령제’라고 한다. 대통령도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고, 국회도 총리와 장관을 다 뽑게 되니 서로가 큰 책임을 갖도록 하는 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대통령제에서는 국회의원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든 별달리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개헌은 가능하면 빠른 게 좋다. 대통령이나 국회에서 과반수 이상이 제안해야 개헌이 시작된다. 지금은 대통령이 권한 정지 상태니까 국회가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다만 내년 상반기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경우 당장 적용이 어렵기 때문에 차차기 대선 때 새 권력 지배 구조를 적용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국회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나 인정을 받지 못해 개헌에 부정적인 여론이 있을 수 있다. 국민에게 충분히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거대 양당이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 빠져 ‘국회선진화법’을 악용하고 선거제도를 엉망으로 만들면서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공화국의 헌법을 가진 것이 올해로 76년째인데, 그럼에도 역대 대통령들은 본인이 전제군주와 같은 대단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때론 헌법을 무시하는 태도도 보였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제왕적 대통령이 될 소지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청와대 정부’도 종식될 것이다. 그동안 대통령 비서관 같은 사람들이 내각 위에 사실상 군림하는 행태가 반복됐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한 만큼, 어느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스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대화하고 타협하는 정치를 만들기 위해 개헌이 절실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현행 대통령제는 정부가 필연적으로 무능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노무현, 박근혜, 윤석열까지 우리가 목도한 대통령의 몰락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몰락이다. 그런데도 개헌을 하지 않는 건 대통령제로 인해 나라가 가라앉는 걸 보면서도 대통령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다.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87년 체제는 제왕적 대통령 탄핵소추로 수명을 다했다. 개헌이 보수 진영, 나아가 한국 정치의 활로가 될 것이다.
현행 한국 대통령 권력은 유신(維新) 시절 대통령 권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정도로 강력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이 통치를 할 수 없는 이원화된 권력 구조다. 노무현 정부 이후 정부가 국가적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게 그 방증이다. 국회 의석 구도가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면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이 충돌하는 이중 권력 구조의 한계다. 대권(大權)을 가져가는 쪽이 권력을 독식하다 보니, 국회를 야당이 지배하면 정부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반목하게 됐다. 여소야대 지형에서는 윤석열 정부에서 봤듯 행정부 기능이 마비돼 정부가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 권한은 많은데 통치를 못 하는 대통령으로선 엄청난 무력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개헌한다면 행정권과 입법권의 조화 측면에서 의원내각제가 가장 좋다. 다수당 당수(黨首)가 총리를 맡고 의원들이 장관을 맡는 내각제 도입을 검토할 때가 됐다. 다만 우리 국민은 ‘얼굴 없는 권력 체제’라 불리는 내각제보다는 내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는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 차원에서 차선(次善)으로 4년 중임(重任) 대통령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년 중임제는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한다.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고, 정당에선 국회의원 후보를 지역 주민이 공천하도록 해야 한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이 내홍을 겪는 것은 집권을 포기한 영남 중심 ‘낙동강 정당화’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낙동강 세력이 어떻게 한강 세력과 연합하고 집권하게 됐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
12·3 비상계엄 사태는 윤석열이라는 개인의 문제와 더불어 현행 대통령제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비상계엄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탄핵에 대한 입장이 갈팡질팡하는 건, 정권을 잃었을 때의 두려움이 큰 것이고 현행 대통령 권한이 막강하다는 방증이다. 반면 국회가 이번에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신속하고 원만하게 이끌어낸 것은 의회 정치에 대한 국민 신뢰를 끌어올렸다. 개헌 논의 자체가 가능할 최소한 조건은 마련된 셈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거의 모든 정부가 임기 중에 개헌을 추진하고자 했다. 노태우 정부는 내각제 개헌 약속을 축으로 3당 합당을 성사시켰고, 김대중·김종필의 DJP 연합은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결성돼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다. 노무현 정부는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가 거부당한 이후 권력 구조 개편을 골자로 한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이명박 정부도 임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행정 구조 개편을 포함하는 개헌안을 띄웠다. 하지만 개헌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한국 사회에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는 퍼져 있지만, ‘이렇게 하자’는 공감이 작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대통령의 실질적 권한이 더 세질 수 있는 중임제보다는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 도입을 주축으로 한 방안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다만 내년에 조기 대선이 실시된다면 당선이 유력한 후보가 자기 임기나 권한을 줄이는 개헌 카드를 수용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승산이 희박한 쪽에서 물타기를 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개헌에 앞서 선거법을 개정해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꾼다면 개헌 못지않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소선거구제는 승자 독식 방식으로 사표(死票)를 양산해 유권자의 표심을 의석수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대통령 권력 독식과 판박이다. 진영 갈등과 정치 양극화를 부추긴 측면이 강하다.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하면 거대 양당이 의석을 양분하는 데다가 쏠림 현상이 강한 소선거구제와 달리 분열과 대립이 완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공천권, 토호성 정치인의 기득권도 지금보다는 약화될 것이다. 광역 의회가 그런 식인데 국회에 비해 정당 간 협치가 강제되는 면이 있다. 이렇게 되면 정치적 대립을 완화하면서 대통령제 운용 방식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김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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