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갑
일러스트=이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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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런 걸 몰라요. 배움이 모자라서….”
화창한 수요일 오전 초면의 노인에게 이런 말을 듣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황은 이랬다. 용달차로 물건 받을 일이 생겼다. 여전히 이럴 때 현금을 쓰되 요즘은 앱으로 이체를 한다. 나도 평소에 그랬다. 물건을 받고 계좌를 여쭙자 할아버지 기사님이 쩔쩔매며 계좌를 모른다고 했다. 내가 무안했다. 현금 몇 장 있으면 됐을 텐데. 나는 그날부터 지갑을 찾기 시작했다.
“저희는 지금 지폐를 넣는 지갑이 없습니다.” 편집 매장 ‘바버샵’ 대표 황재환의 말을 듣고 현실을 실감했다. 21세기 서울의 쇼핑 환경에서 지폐를 담는 지갑의 종적 다양성은 점차 줄고 있다. 황재환의 매장은 남성 잠옷까지 취급할 만큼 물건이 다양한데 지갑은 없다. “정확한 시점이나 기점이 기억나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갑의 수요가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요즘은 카드를 쓰니까요.” 안 팔리는 물건을 가져다 둘 수는 없다.
그의 느낌은 통계로 증명된다. 한국은행은 2015년, 2018년, 2021년 ‘경제 주체별 현금 사용 행태’를 발표했다. 모든 조사 결과가 현금 없는 사회의 초상이다. 가구당 월평균 현금 지출액, 전체 지출액 중 현금 차지 비율 등의 지표가 일제히 하락했다. 현금 지출 비율은 2021년 기준 1.2%에 불과하다. 일상 거래를 위해 소지하는 현금인 ‘거래용 현금’이 아예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 역시 1.7%에서 3%로 증가했다.
스마트폰이 전자 지갑이 된 건 상식이지만 자료를 보면 초고속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금융 플랫폼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의 2023년 매출은 2021년에 비해 60%나 성장했다. 이 앱의 월간 활성 사용자(MAU) 역시 1900만명을 넘는다. 현금뿐 아니라 각종 멤버십 카드도 스마트폰으로 들어갔다. 대한항공은 이미 2020년 회원용 ‘스카이패스’ 실물 카드 발급을 중단했다. 지갑에 넣을 게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다.
여기까지라면 그저 시대의 변화 앞에서 사라지는 수많은 물건 이야기다. 지갑도 이 흐름대로라면 사람이 한때 지녔으나 지금은 박물관에 있는 파이프 담배 같은 물건이 될까. 아니라는 게 지갑 사례의 흥미로운 점이다. 사회의 관성과 인간의 의례 본능은 생각보다 강하다.
일단 카드 지갑이 진화하고 있다. 3장, 5장, 7장 등 카드 수납 역량에 따라 지갑의 종류가 늘었다. 편집 매장 바버샵도 지갑을 계속 취급한다. 대신 카드 지갑이다. 얇은 것, 카드가 많이 들어가는 것, 장식적인 것. 이 추세는 신용카드 발급 추이와 맞물린다. 2023년 국내 발급 신용카드 수는 1억2980만장이다. 생산 및 구직 활동이 가능한 국민 1인당 신용카드 수도 2004년 3.5장에서 2023년 4.4장까지 늘었다. 카드 지갑 수납 공간이 늘어날 만하다.
한국은행이 조사한 경제 주체별 현금 보유액을 봐도 현금 사용은 줄지 않는다. 30만원 미만의 예비용 현금을 보유한 가구 비율은 오히려 늘었다. 흥미롭게도 5000원권과 1000원권 보유 및 거래는 대폭 줄었다. 현금 액면가가 가장 높은 5만원권이 거래용 현금 중 비율이 가장 높았다. 5만원권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경조금. 현대사회에서 현금은 일종의 의례의 상징이 된 걸까.
실제로 ‘돈봉투’를 만든 패션 디자이너가 있다. ‘카피 오브 카피’ 디자이너 장우석은 상품권 봉투에 현금을 넣어 다니는 사람을 보고 돈봉투 모양 지갑을 만들어봤다고 했다. “시험 삼아 만들어본 건데 의외로 제작 문의가 있었습니다. 쇼핑몰에서 내렸는데 소셜미디어 메시지로 제작 문의가 오기도 했어요.” 여전히 장지갑을 구비한 ‘아서앤그레이스’ 대표 한채윤도 장지갑의 수요를 느낀다고 했다. “부자들은 장지갑을 쓰더라고요. 돈이 많은 사람들은 돈을 소중히 여기거든요.” ‘사업하는 사람들은 돈을 구기지 않는다’는 속설이 떠오른다. 그러나 여전히 속설은 어떤 이론보다도 힘이 세다.
사람은 손이 닿는 모든 물건에 사용 가치와 별개의 심리적 의미를 씌운다. 화폐라는 물건도 마찬가지다. 화폐를 담는 물건인 지갑의 심리적 가치도 여전할 것이다. 그렇게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에서, 인간의 의례 속에서 지갑은 오늘도 계속 여닫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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