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의전화 등 `56년 만의 미투,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최말자씨가 2023년 5월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대법원의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해 즉각 재심 개시 결정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최말자씨는 18살이던 1964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56년만인 2020년 재심을 청구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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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전 성폭력 가해자에게 저항하다 그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중상해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78)씨가 재심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1964년 자신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중상해죄로 구속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은 최씨의 재심을 받아들이지 않은 원심판결을 지난 18일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0일 밝혔다. 부산고법에서 최씨의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지고 이를 대법원이 다시 확정하면 최씨는 당시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60여년 만에 다시 받게 된다.
앞서 부산고법은 당시 수사가 불법이었다는 최씨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사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심청구를 기각한 바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수사기록 없이도 최씨의 진술만으로도 불법수사를 의심할 만하다고 봤다.
1964년 5월6일 저녁. 18살이던 최씨는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당시 21살이던 노아무개씨로부터 성범죄를 당했다. 노씨가 느닷없이 최씨를 쓰러뜨리고 입을 맞추려고 달려든 것이다. 최씨는 입안에 혀가 들어오자 ‘이대로 숨 막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확 깨물어 저항했고, 노씨의 혀가 1.5㎝ 잘렸다.
최씨는 이 사건으로 이듬해 1월 부산지법 형사부(재판장 이근성)에서 중상해죄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반면 노씨의 성폭력은 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사건 56년 만인 지난 2020년 5월 최씨는 한국여성의전화의 도움을 받아 부산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청구 사유는 최씨가 검찰 수사 당시 영장도 보지 못한 채 구속되는 등 불법 구금 등 당시 불법수사가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형사소송법 제420조의 재심 청구 사유에는 ‘증언이나 증거가 허위임이 입증되는 등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성이 발견된 경우’가 있다.
그러나 1심과 항고심 모두 재심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심 법원은 당시 검찰의 불법 구금 등을 증명할 객관적이고 분명한 자료가 제시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최씨의 청구를 기각했고, 항고심 법원도 1심의 판단이 맞는다고 봤다.
18살 때 자신을 성폭행한 남성에게 저항하다 상해를 입힌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씨가 56년 만의 재심 청구를 준비하며 지난 2020년 4월30일 부산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연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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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법원은 불법수사를 고백한 최씨의 진술만으로도 재심 사유가 충분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재심청구의 이유가 있는지 판단할 때는 사실을 조사할 수 있는데 이때 공판절차에 적용되는 엄격한 증거조사 방식을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실조사가 필요한지 여부의 판단은 법원의 재량이지만, 재심청구인의 진술 그 자체가 재심이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핵심적 증거로서 신빙성이 있고 그 진술의 내용 자체나 전체적인 취지에 부합하는 직·간접의 증거들이 상당수 제시된 경우에는 별다른 사실조사도 없이 ‘재심청구인의 진술’ 외에 다른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재심청구를 기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불법 구금에 대한 최씨의 일관된 진술 내용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고, 그 진술에 부합하는 직·간접의 증거들 즉, 재심대상 판결문, 당시의 신문기사, 재소자인명부, 형사사건부, 집행원부 등에 의해 알 수 있는 일련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의 사정들이 제시된 반면, 그 진술을 탄핵할 수 있는 다른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고 봤다. 그러면서 “최씨가 불법으로 체포·감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고, 이와 같은 검사의 행위는 형법 제124조의 직권남용에 의한 체포·감금죄를 구성한다”고 판단했다. 최씨의 청구 이유가 재심개시 사유에 해당한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또한 “재심은 확정판결의 중대한 오류를 시정하고 일반적인 형사재판절차에서 형사소송원칙에 따른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억울한 피고인을 구제해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 등을 유념하고, 비상구제절차인 재심제도의 목적과 이념 등을 두루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도 했다.
최씨를 중상해죄로 유죄 판결한 이 사건은 정당방위를 다툰 대표적인 판례로 형법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대법원도 1995년 법원 100년사를 집대성한 ‘법원사’를 발간하면서 이 사건을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으로 소개했다.
이같은 최씨의 억울한 사연과 재심 청구 사실은 지난 2020년 5월4일 한겨레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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