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탄핵 집회에 등장한 ‘1인칭 깃발 시점’
대학원생 문서윤(25)씨는 지난 7일 여의도 집회에 참석했다. 문씨는 “깃발을 만들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며 “급한 대로 종이에 ‘더는 미룰 수 없다 나의 논문 너의 탄핵’이라고 휘갈겨 들고 있었다”고 했다. 고이 간직해 둔 ‘샤이니’ 응원봉은 잊지 않고 챙겼다. “오랜만에 콘서트에 간 것처럼 오히려 스트레스 풀고 왔어요. 큰 소리로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면서 할 말 다 하고 왔습니다.”
집회에서 ‘단결’ ‘투쟁’ 같은 구호와 깃발, 머리띠, 주먹질 같은 비장미가 사라지고 있다. 12·3 계엄 이후 이어진 탄핵 촉구 집회에서는 생경한 풍경들이 이어졌다. 2030 여성이 다수를 차지했고, 온갖 아이돌 응원봉을 흔들었으며, 소녀시대의 ‘다만세(다시 만난 세계)’, 로제의 ‘아파트’ 같은 K팝 떼창이 이어졌다.
이번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는 온갖 특이한 깃발이 쏟아져 나왔다. '전국고양이노동조합', '강아지발냄새연구회', '만두노총 새우만두노조'…. 개인의 취향과 유머를 담아 '자체 제작'한 것들이다. /연합뉴스·인터넷 커뮤니티. 그래픽=송윤혜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시뻘건 궁서체의 노조와 당명이 부각된 야당 깃발은 뒷전으로 밀렸다. 대신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연맹’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전국 수족냉증 연합’ ‘직장인 점심 메뉴 추천 조합’ ‘전국 과체중 고양이 연합’ ‘(내향인)’ ‘나, 혼자 나온 시민’ 같은 위트 있는 깃발들이 나부꼈다. 어떤 소속이나 주의·주장을 표방하지 않았다. 각자의 정체성을 발랄하게 드러낸 것이 전부. 단독자, 소우주인 나, 그것으로 됐다는 뜻일까. ‘1인칭 깃발 시점’이라고 명명해본다. 새로운 시위 문화의 등장이다.
◇2030 여성과 K팝
2030 여성이 주도한 이번 시위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지난 7일 첫 번째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열린 집회에서 여의도 생활 인구는 37만3000여 명으로 전주(9만5000명) 대비 27만8000여 명 증가(17시 기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5~29세 여성이 3만2000명, 20~24세 여성이 3만1000명으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직전 토요일과 비교해도 두 집단의 증가 폭이 가장 두드러졌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2차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루 앞둔 1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운동권 출신인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은 이 현상을 K팝 문화의 진화된 형태로 해석했다. 그의 고3 딸도 이번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가 끝나고 밥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는 데만 40분이 걸렸다고. “얼마 전에 딸이 좋아하는 밴드 공연에 따라갔는데, 이번 집회와 양태가 똑같았어요. 여성이 80~90%에 달하고, 취향이 비슷한 또래가 모여 두어 시간쯤 떼창을 하면서 춤추고 놀아요. 반면 세 살 위인 아들은 그 시간에 집에서 게임을 합니다. 2030 남자들은 대통령 탄핵에 공감하더라도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 같은 데서 말하는 거죠. 어디서 뭘 하고 노는지, 어느 공간에 주로 있는지, 남녀의 ‘참여’ 감수성이 다른 것 같아요.” 그 참여 감수성이 아이돌 팬덤, 공연 문화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최 소장 부녀는 ‘촛불’로 상징된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에도 참석했다. 이제 수능을 치른 고3이지만, 시위 참여 마일리지는 5~6번이 넘어가는 셈이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드는 과거의 과격 시위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한 시위를 경험한 세대라는 것. 최 소장은 “MZ들은 과거의 계엄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대통령이 군대를 시켜 국회에 쳐들어갔다’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한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탄핵 촛불 시위가 촛불이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획일화된 것이었다면, 2030 여성이 주도한 이번 시위는 각자의 깃발과 응원봉으로 수없이 다양한 개개인이 하나의 지향을 말했다는 점이 크게 달라요.”
K팝은 세계 곳곳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공유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앞서 미얀마·태국·칠레 등에서 일어난 반정부·민주화 시위에서 2030이 K팝을 ‘저항의 운율’로 활용한 것. 방탄소년단(BTS)은 미국의 인종차별(BLM·Black Lives Matter), 홍콩 시위 등에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형형색색 응원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여의도 직장인 안모(40)씨도 퇴근길에 자연스럽게 여러 번 집회에 참여했다. 그는 “모두 응원봉을 들고 나와서 그런지 콘서트장 같은 분위기가 됐다”며 “어떤 아이돌의 팬들이 모인 것처럼 서로 핫팩도 나눠주고 챙겨주는 다정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이번 집회 때는 국회의사당역 여자 화장실에 누군가 놓고 간 핫팩과 여성용품 등이 쌓여 있고, 근처 커피숍과 식당에 집회 참여자를 위한 ‘선결제’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아이유와 소녀시대 멤버 유리 등 유명 인사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의 참여도 많았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재미(fun)가 강조됐다는 점에서 올해 여성 팬이 대거 유입되면서 폭발한 프로 야구 붐이 겹치기도 한다”며 “여성들의 정치적 효능감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실제 30대 여성 투표율은 30대 남성보다 5~8%포인트 정도 높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뒷전으로 밀려난 아재들
2030 여성은 민중가요를 모른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과거 시위를 주도했던 50대 언저리 ‘아재 그룹’은 오히려 비주류로 밀려났다. 직장인 이재혁(52)씨는 “정말 피가 끓어 나갔는데 춤추고 노는 모습에 벙쪘다”며 “아이돌 노래를 모르는 5060은 오히려 소외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다만세’ 정도는 외우고 시위 현장에 나서야겠다면서도 ‘이렇게 즐겁기만 해도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촛불 행동’ 카페에도 “엄중한 탄핵 집회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게 맞나?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쳐야 할 거 같은데 너무 실망스럽고 아쉽다”는 글이 올라왔다. 한 야당 전직 국회의원은 “‘얼죽아’까지는 알겠는데 ‘얼죽코’는 모르겠더라”고 했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깃발 옆에 ‘얼죽코(얼어 죽어도 코트)’ 깃발이 있었다고.
민주당 장경태 의원은 “국회 앞 시위에 몇 차례 나가봤는데 과거의 정권 퇴출 시위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며 “노조나 정당은 더 이상 집회를 지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청래 의원이 ‘시위에 나온 사람이 나를 못 알아본다’고 하더라고요. 정 의원은 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고, 윤석열 정권 퇴출 시위였잖아요. 그 유명한 정청래를 모르는, 당색이 전혀 없는 2030이 쏟아져 나온 겁니다.”
계엄 이후 국회에 발이 묶인 상황이기도 했지만, 야당 국회의원들은 이번 탄핵 집회에서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몇몇 의원은 발 빠르게 “나도 있다 응원봉” 인증샷을 SNS에 올렸고, 지난 13일 집회 때 무대 위에 오른 가수 이승환의 공연을 구경 가는 수준이었다. 민주당은 이날 국회에서 탄핵 촉구 결의문을 낭독하면서 ‘윤석열 탄핵’ 같은 손팻말 대신 각자 응원봉을 구해 들었다. 의원실마다 막내 비서관들이 응원봉 구해 오는 임무를 맡았다고.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개개인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연결된다. 집단성보다는 관계성이 부각되는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상하 관계가 아닌 수평 관계의 시위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우두머리가 있고 특정한 목표를 하방으로 쫙 퍼지게 하는 과거 방식은 먹히지 않는 거죠. 조직을 동원했다면 오히려 덜 모였을 거예요. 콘서트처럼 즐겁게, 강압적이지 않게, 스스로 만들어가는 집회이다 보니 허들이 낮아진 겁니다.”
◇이제 내 갈 길 간다
지난 14일 집회 현장에는 얼굴에 반창고 투성이인 젊은 여성들이 보였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김모(19)씨는 “입시 끝나고 코 성형 수술을 받았다”며 “쌍커풀 수술 받은 친구와 같이 ‘까짓것 한번 가보자’ 하는 생각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는 그의 친구는 선글라스를 썼다.
이날 오후 5시쯤 찬성 204표로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 시위 참석자들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했다. 11일 만에 이뤄냈다, ‘정치적 효능감’에 고무됐을 것. 하지만 여흥은 길지 않았다. 일제히 발걸음을 돌려 서강대교를 건넜다. 지하철이 국회의사당역에 서지 않았기 때문.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내 갈 길 간다는 식이다. 서강대교를 건너 홍대로 놀러 간 조승준(29)씨는 말했다. “겨울 내내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후련해요. 이제 제 할 일을 해야죠. 재미있었습니다.”
[김경화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