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에도 걸음걸이가 있다고 하죠. 이미지와 로고로 구성된 어떤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각인되기까지, 브랜드는 치열하게 ‘자기다움’을 직조합니다. 덕분에 브랜드는 선택하는 것만으로 취향이나 개성을 표현하고, 욕망을 반영하며, 가치관을 담을 수 있는 기호가 됐죠. 비크닉이 오늘날 중요한 소비 기호가 된 브랜드를 탐구합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호텔을 찾는 사람도 많아졌어요. 친구∙가족들과 휴가를 보내거나, 포럼∙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한 발걸음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요즘 호텔의 달라진 모습, 눈치채셨나요. 바로 종이팩에 담긴 물입니다. 고작 물 한 병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객실과 행사장에서는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기에 존재감도 크죠. 그런데 지금까지 플라스틱 물병이 대세였다면, 요즘엔 종이로 만든 멸균팩 생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어요.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진행된 한 행사에 멸균팩에 담긴 물이 비치됐다. 사진 테트라팩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사실 호텔이 아니어도 이미 멸균팩은 편의점∙슈퍼마켓에서 쉽게 보입니다. 우유∙두유부터 단백질 음료, 과일주스까지 종류가 다양하죠. 멸균팩에 들어있는 음료는 냉장 보관이 필요 없는데도 1년 이상 장기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무게가 가볍고 부피가 상대적으로 작아 휴대하기도 좋고요. 현대인의 일상에 소소한 도움을 주는 이 멸균팩은 누가, 어떤 이유로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어떤 기술이 있길래 장기∙상온 보관이 가능한 걸까요. 오늘 비크닉에서는 세계 최초로 멸균팩을 만든 ‘테트라팩’의 이야기를 알아볼게요.
━
소시지 제조법에서 착안…사면체 패키지 개발
멸균팩의 탄생 스토리는 70여 년 전인 1951년, 스웨덴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룬드 지역에서 시작합니다. 경제학을 공부했던 루벤 라우싱 박사는 우유를 신선한 상태로 오래 마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당시엔 우유가 유리병에 담겨 유통돼 빨리 상하기 일쑤였죠. 무게 때문에 먼 곳으로 배달하기도 어려웠고요.
그러던 어느 날, 박사는 우연한 일로 해결 방법을 찾습니다. 부인 엘리자베스와 소시지 만드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레카’를 외쳐요. 긴 튜브에 고기를 넣은 뒤 튜브를 묶어 소시지를 만드는 방식을 우유 패키징에도 활용하기로 한 거예요. 마치 순대 껍질에 속 재료를 넣은 뒤 묶는 것처럼 말이죠. 내부를 밀랍으로 코팅한 종이팩에 우유를 채운 뒤 뜨거운 열로 팩을 끊어내는 순간 밀봉하는 방식인데, 우유를 채울 때 생기는 거품 공간이 없어지면서 산소 개입을 줄일 수 있습니다. 우유 부패를 막는 핵심 아이디어인 거죠.
테트라팩의 초창기 제품인 '테트라 클래식'. 사진 테트라팩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렇게 탄생한 초창기 팩은 ‘테트라 클래식’이라는 이름의 삼각뿔 형태 우유팩입니다. 테트라팩이라는 회사 이름도 사면체를 뜻하는 영어 ‘Tetrahedral’에서 따온 말이에요. 당시엔 이 테트라 클래식에 우유뿐만 아니라 크림 제품도 담겨 판매됐습니다.
━
겹겹 쌓은 팩…“멸균 포장은 가장 혁신적인 식품 기술”
삼각뿔 패키지를 출시한 뒤에도 라우싱 박사는 멸균 패키징 기술 개발에 전념합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유통이 미래 산업의 핵심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음식을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관하고 포장재와 물류비용을 줄이는 것이 유통 활성화를 위한 방법이라고 여겼죠.
마침내 테트라팩 창립 10년 만인 1961년, 현재의 멸균팩 형태인 벽돌 모양 패키지가 등장합니다. 멸균팩은 종이∙알루미늄∙폴리에틸렌 등이 여섯 겹 쌓여있는데, 층을 두는 이유는 각자 맡은 역할이 있어서죠. 각 소재는 내용물이 밖으로 새는 걸 막거나 외부 균을 차단해요. 특히 네 번째 들어간 알루미늄 막이 핵심적 기술인데요, 알루미늄 포일이 외부로부터 빛과 산소를 차단해 무균 상태로 장기 보존이 가능하도록 만듭니다.
테트라팩 창립자인 루벤 라우싱 박사. 사진 테트라팩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장기∙상온 보관의 비밀은 멸균 기술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셉틱 기술(Aseptic System)’이라고도 불리는 멸균 기술은 88~92도 고온으로 멸균한 음료를 급속 냉각한 뒤 멸균 용기에 넣는 기술인데요. 음료의 맛과 영양소 변화는 거의 없는데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2002년에 국제식품학술기구(IFT)는 박사의 멸균 포장 기술이 “20세기 등장한 식품 기술 중 가장 혁신적인 제품”이라고 평가했어요. 부패 없이 먼 곳으로 운송이 가능한 포장기술 덕에 테트라팩은 다른 대륙에 대규모 수출도 시작하죠.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은행과 협력해 케냐, 르완다 등 개발도상국 일부 지역에 우유를 제공하기도 했어요.
테트라팩이 1972년 처음 선보인 남양밀크 제품. 사진 테트라팩 |
테트라팩의 기술은 1972년 한국에도 처음 소개됐습니다. 남양의 ‘남양밀크’ 제품과 함께 말이죠. 이후 지난 50여년간 정식품·매일유업·삼육식품 등 국내 25개 식음료 업체와 함께하고 있어요. 국내에서만 매년 22억 개 이상의 패키지를 만들어 판매하죠.
━
지속가능한 환경∙식량 시스템 구축이 목표
멸균팩의 발명이 일상의 편리함만 주는 건 아닙니다. 지속가능한 환경에도 이로운 기술이에요. 상해서 버려지는 음식물의 양을 줄일 수 있고, 냉장 보관에 필요한 이산화탄소 배출 역시 감소할 수 있으니까요. 또 유통 과정에서 탄소 배출량과 비용을 줄일 수 있어요. 모양 역시 벽돌 형태라 벽돌 쌓듯 적재해 수출입에도 용이하죠.
'테트라 클래식'을 만드는 모습. 사진 테트라팩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테트라팩의 찰스 브랜드 가공 솔루션 및 장비 담당 부사장은 “식량 시스템이 오늘날 글로벌 온실가스 배출량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데, 식량 생산 과정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가공식품 개발로 식품 손실을 줄여 지속가능한 식량 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어요.
테트라팩은 제품 생산 과정에서도 환경을 강조합니다. 멸균팩의 71%는 국제산림관리협의회(FSC)가 인증한 나무로 만들어진 종이예요. 버려진 후에도 다시 활용할 수 있는데, 크라프트지나 휴지가 되기도 하고 건축 자재로도 활용됩니다. 2016년엔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에 가입해 2030년까지 운영에 필요한 재생에너지 사용량을 100%로 늘리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죠.
━
한국에선 ‘재활용 어려움’…. 시스템 구축이 과제
국내에서 유통되는 다양한 멸균팩 음료.사진 테트라팩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처럼 ‘친환경’을 지향하는 테트라팩도 국내에서는 큰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바로 국내 멸균팩 재활용 시스템 구축입니다. 환경부는 지난 1월, 멸균팩 재활용이 어렵다는 이유로 ‘재활용 어려움’ 표시를 시행했어요. 일반팩(냉장유통 종이팩)이 주류인 우리나라에선 멸균팩을 다시 활용하는 게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죠.
테트라팩은 해법을 찾기 위해 지난 2021년부터 매일유업, 삼영제지 등과 함께 ‘한국멸균팩재활용협회’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멸균팩 재활용을 높이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직접 멸균팩 재활용 업체와 업무 협약을 맺는가 하면, 지난 8월엔 전국 이마트에브리데이 20여 곳에 멸균팩 IoT 회수기를 설치했죠. 2018년부터 공동주택 및 대형마트에 멸균팩 자동 회수기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지자체와 연계해 수거함 설치·운영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청주시 공동주택에 있는 멸균팩 재활용함과 이마트에브리데이 앞에 설치된 멸균팩 수거함.사진 테트라팩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멸균팩은 시스템만 제대로 구축되면 100% 재활용할 수 있고, 플라스틱병과 비교할 때도 생산·유통 과정에서 탄소배출량이 적어요. 그런데도 우리나라 멸균팩 재활용률은 10% 미만인 것에 비해 유럽은 평균 50%이고, 일부 유럽 국가는 70%를 훌쩍 넘죠. 국내 기후∙환경 단체들이 멸균팩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한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내는 이유입니다.
제아무리 최고의 기술이라도 제도와 함께 갈 때 더 빛을 발할 수 있을 텐데요, 앞으로 우리나라 멸균팩 재활용 시스템은 어떻게 변화할까요. 테트라팩의 친환경을 위한 행보, 그리고 여기에 정부와 민간이 어떻게 화답하는지 비크닉도 한번 지켜볼게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서혜빈 기자 seo.hyebin@joongang.co.kr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