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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월)

전기차 캐즘에 가로막힌 K-배터리, 돌파구는 결국 ‘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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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손성호 한국전기연구원 미래전략실장


필자의 형은 어렸을 때부터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좋아했다. 워크맨, CD플레이어, 휴대용 멀티미디어 기기(PMP), MP3 플레이어 등 새로운 기능으로 무장한 제품이 출시되면 용돈 등을 열심히 모아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구매에 나섰다. 반면에 필자는 어느 정도 제품이 보편화되고 대중화됐을 때 구매하는 편이었다.

마케팅 이론은 기술과 제품 확산에 대한 수용 속도를 기준으로 고객을 분류한다. 필자의 형과 같이 초기에 새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혁신자(Innovators)’ 및 ‘초기 수용자(Early Adopters)’라고 한다. 이들은 전체 고객의 15% 정도로, 초기 시장을 형성한다. 그리고 필자와 같은 사람들은 주류 시장에 해당하는 70%에 속한 고객이다. 나머지 15%의 고객은 후기 시장에 해당하는 지각 수용자 또는 구매 거부자이다.

이 모델과 관련돼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정의한 용어로 ‘캐즘(chasm)’이 있다. 이는 원래 지각변동에 의해 생기는 균열로 인한 단절을 의미하는 지리학 용어인데, 경제학에서는 초기 시장에서 주류 시장으로 넘어가야 하는 단계에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하거나 후퇴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전기차 분야의 캐즘 현상을 다루는 기사를 많이 접하게 된다. 각 국가에서 나타나는 탄소중립 정책 속도 조절 및 보조금 축소, 그리고 수요 둔화 등으로 전기차 판매량은 주춤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캐즘 현상이 후방 산업인 배터리 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캐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주류 시장 고객을 끌어당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초기 시장 수용자들과는 달리 혁신성보다는 실용성이나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크다. 따라서 전기차 산업은 제품 가격을 낮추거나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배터리는 전기차 원가의 4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원가 절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효율이 높은 대신에 고가인 삼원계(NCM·NCA) 배터리에 강점을 보여 온 국내 기업들에 불리하다. 반면에 가격이 약 30% 정도 저렴하고 안정성 측면에서 뛰어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위주로 생산을 해 온 중국 기업들에 기회를 주고 있다. 유럽 시장에서 중국 배터리 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은 점차 늘고 있으며, 테슬라를 비롯한 미국의 전기차 업체들도 LFP 배터리 사용을 확대하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체들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관련해서도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어 향후 전망은 더 어둡다.

캐즘 극복을 위해 중저가 배터리 시장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일은 그만큼의 자원 투입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한국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중국 기업과 가격 외 다른 부분에서 차별화해야 하는데, 안정성을 확대하는 등 품질 위주의 기술 혁신에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해 최근 국내 배터리 산업의 주요 주체들이 모여 차세대 이차전지 연구·개발(R&D)을 추진하고 있다. 고에너지 밀도 및 고안정성, 초경량 등을 주요 키워드로 정부출연연구기관, 대학, 기업 등 50여개 기관이 협력해 앞으로 5년 동안 자원을 투입한다. 이러한 노력이 모여 배터리 산업 앞에 놓인 깊은 골짜기를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만들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손성호 한국전기연구원 미래전략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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