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연 전여농 충남연합 사무처장(오른쪽)이 남태령 투쟁에 연대하러 온 지인과 사진을 찍고 있다. 신지연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저는 충남 부여에서 유기농 채소와 토종쌀, 토종밀 농사를 짓는 여성 농민입니다. ‘전봉준투쟁단’입니다. 그리고 비티에스(BTS) 팬 ‘아미’입니다.”
신지연(49)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충남연합 사무처장은 지난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 고개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21일 새벽 6시 충남 부여에 있는 집을 나서 1박 2일에 걸친 상경 투쟁을 마치고 약 40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전여농, 전국농민총연맹(전농) 등이 주도한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대행진은 21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려 했으나 경찰 차벽에 막혀 남태령 고개에서 밤새 경찰과 대치했다. 28시간 여 만에야 경찰이 물러나고 투쟁단이 나아간 이 사건은 ‘남태령 대첩’으로 불리고 있다.
신 처장은 23일 심한 몸살이 와서 수액을 맞았다. 하지만 ‘남태령 연대’의 기억은 강렬했다. 그는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시민들이) 농민들의 집회를 ‘도와주러 왔다’ 이런 게 아니라 자기 일처럼 움직였다”면서, 남태령 현장에서 “조건 없는 연대감”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후원 물품이 계속 들어오니 누군가는 정리하고 나눠줘야 하는데, 저뿐만이 아니라 농민 대부분이 그날 종일 밥을 못 먹었거든요.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시민들이 핫팩, 방석 등을 나눠주거나 화장실 안내를 하는 등의 일을 많이 했어요.”
1999년 스무 다섯살 때부터 농사를 지으며 25년 동안 농민투쟁에 참여한 신 처장은, 경찰이 농민투쟁을 대하는 폭압적 태도를 숱하게 목도했다. 2003년 임산부일 때 고 이경해 열사 장례식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맞아 온몸이 멍든 채 열흘 동안 병원에 입원한 일은 20년이 흘렀어도 생생하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전봉준투쟁단 활동 때도 경찰의 강경 진압 탓에 귀가 찢어져 10바늘을 꿰매야 했다.
이번엔 달랐다. 신 처장은 ‘시민들이 모이니 경찰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말을 체감했다. “경찰의 태도에 아예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피 흘리고 다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시민들이 없었으면 저희는 다 (경찰에) 잡혀갔을 것”이라며, “큰 감동을 받아, 나중에 이 연대를 떠올리면 농사를 더 열심히 지을 수 있겠다 싶었다”고 했다.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가 경찰버스로 막혀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전봉준투쟁단은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처음 결성됐다. 2015년 11월 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사망한 일이 조직 출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 처장은 8년 전에 이어 이번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두 번째 투쟁단에도 기꺼이 합류했다.
그는 “지금까지 농민을 위한 정권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윤석열 정권은 대놓고 농민을 거부하고 무시한 최초의 정부”라며, “계엄 전, 국민들이나 다른 단체들이 대통령 퇴진을 전면에 걸지 못할 때, 농민들은 이미 지난해 여름부터 (윤석열이) 대통령 하면 안 된다고 결정하고 싸워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4일 윤 대통령은 양곡관리법에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대통령 취임 뒤 첫 거부권 행사였다. “그때 농민들의 상실감은 어느 정권 때보다 컸어요. 우린 국민이 아닌가보다 싶을 정도로…. 단순히 법에 대한 거부를 넘어서 농민과 농업에 대한 거부로 여겨질 만큼 거친 발언이 많았거든요.” 전봉준투쟁단은 이미 지난 10월부터 단원을 모집했다. 농기계인 트랙터를 앞세우는 행진 상경 투쟁은 ‘12·3 내란 사태’ 이후 결정됐다.
8년 전 전봉준투쟁단이 양재나들목(IC)에서 경찰과 대치할 때도 시민들이 후원 물품을 보내고 함께 노숙하는 등 농민투쟁에 연대했다. 이번엔 더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여성, 청소년,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며 농민의 차별 경험에 공감하는 연대 발언들과 그 목소리들을 경청하는 태도·분위기가 형성됐다.
“발언하는 분들이 대부분 자신의 엠비티아이(MBTI·성격유형검사)를 ‘아이’(I·내향형)로 소개했는데(웃음), 아이임에도 농민들이 이렇게 소외받고 처절하게 싸우는 걸 봐서 그런지 자신들이 차별 받은 경험들, 남들에게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 개인사까지 솔직하고 용감하게 공유해줬어요. 정치 선동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제가 과거에 (대선에서) 윤석열 찍었습니다!’ 이런 말까지. 안 해도 되는 얘기잖아요.(웃음) 그런 발언 나와도 사람들이 다 괜찮다고 격려해줬어요.”
신 처장은 ‘남태령 연대’가 가부장성 강한 농민 문화를 바꾸는 자극제가 됐다고 평가했다. 농민운동계에서도 성평등을 위해 노력해왔지만, 일상에서의 실천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는 “농촌의 성평등은 도시의 성평등과는 다르다”며 “여성 농민은 법적 지위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농업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지만, 농업 정책은 세대 단위로 이뤄지기에 세대주인 남성 농민에 가려져 ‘무급 가족 종사자’에 머무는 경우에 많아서다. 여성 농민 배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2016년 공동경영주 제도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신지연 처장이 전여농 생태농장에서 다른 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신지연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신 처장은 인터뷰 말미에 조심스럽게 “‘남태령 대첩’ 현장에는 없었지만 이 싸움이 존재하는 데 크게 기여한 여성 농민들도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운전자는 모두 남성이다. 여성 농민 가운데도 트랙터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만, 고가의 트랙터를 소유할 만큼 경제적 주도권을 가진 여성 농민은 거의 없는 현실 탓”이라고 말했다. “돌봄이 필요한 가족이 있거나 농사 현장을 비울 수 없어서 트랙터 대행진에 참여할 수 없는 여성 농민도 있다”고 덧붙였다. “트랙터 운전자들 모두 정말 고생하고 대단한 일을 했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그 뒤에 가려진 여성 농민들도 ‘남태령 대첩’의 영광을 함께 누렸으면 해요.”
그는 22일 남태령 고개에서 “성평등한 농촌 만들기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 연대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자유발언에서 귀농하고 싶다는 여성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 이런 얘길 듣고 농촌에 오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십시오. 저희가 든든하고 씩씩한 언니로 여러분들이 기댈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조금씩 바꿔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농촌을, 사회를 함께 바꿔갑시다. 우리가 함께 만듭시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