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8 (토)

민주주의와 내란 사이에 중립은 없다 [세상읽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지난 4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의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계엄 규탄’ 집회에서 한 시민이 한겨레에서 발행한 호외를 읽어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밤, 1980년 비상계엄 전국 확대 뒤 44년 만에 계엄을 선포했지만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면서 비상계엄은 해제됐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홍원식 | 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





악몽 같던 계엄의 밤을 지낸 지 벌써 3주가 넘었지만, 여전히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국회에서 어렵게나마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이제 좀 정리가 되겠지 하는 기대와 달리, 대놓고 시간끌기 전략으로 들어간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과 계엄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다시 친윤으로 되돌아가버린 국민의힘 앞에서 정국은 일종의 교착 상태에 빠져버린 모습이다. 덕분에 싸늘하게 식어버린 연말 분위기도 그렇지만, 취소했던 연말 모임을 어렵사리 되살려서 만나는 동료와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도 마음 편한 안도감보다는 불안감이 더 많이 묻어난다. 우리의 국격과 경쟁력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트린 내란 세력들에 대한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와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그들의 ‘미친 계획’들 때문에 되살아나는 계엄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많은 이들을 불면에 시달리게도 하고 있다.



계엄의 밤에 대부분의 우리 언론은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회에 밀고 들어오는 계엄군 앞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언론의 발 빠른 현장 전달은 시민들이 국회를 지키는 방패와 창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힘이었다. 여러 언론이 계엄을 기계적 중립으로 다루지 않겠다는 내부의 입장을 정리하였고, 계엄 사태를 곧바로 불법 내란 행위로 규정하여 보도하기 시작했다. 총을 들고 국회에 난입하는 장면을 온 국민이 목도한 상황에서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바이든/날리면’ 사태처럼 명백한 사실마저도 정치권력의 몇마디 말장난으로 정치공방화해버렸던 걸 고려하면 이번에 여러 언론사가 짧은 시간임에도 과감하고 정확한 판단을 한 것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계엄 선언 이후 며칠간 우리 언론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고 누구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인가를 괜찮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시적 교착 상태에 빠진 지금, 눈치 빠른 언론들은 조금씩 본래의 익숙한 그들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새로운 정치적 관심거리를 찾아서 “논란이다” 또는 “논란이 예상된다”는 자신들의 기대를 주문 걸듯이 갖다 붙이는 익숙한 그 모습 말이다. 평범한 시민들은 여전히 내란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언론의 의제는 국민의힘 내부 권력싸움에서 대선과 개헌으로 어지러이 흘러 다니고 모든 사안은 정파에 따른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지는 정치 패널들과 이른바 분석 기사에 의해서 정치적 공방으로 내파되어 버리고 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계산법이지만, 헌법재판관의 임명이나 윤석열 수사, 내란 특검법 수용 등 시급히 처리되어야 하는 사안들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심 판결 일정을 따져가며 일종의 거래나 논쟁거리로 다뤄지는 것이 무슨 정해진 공식인 것처럼 여러 언론에서 반복되고 있다.



물론, 언론이 본래 체질적으로 늘 다른 언론사보다 빠르게 새로운 의제를 발굴하거나 논란을 만들고 관심을 유도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때로는 시민들의 염려가 해소될 때까지 의제를 꾸준히 유지시켜주는 ‘어젠다 키핑’이 더 필요한 가치가 되기도 한다. 또한 중립성이라는 허울 좋은 언론의 안전장치가 실제로는 언론을 시민들로부터 외면받게 만드는 가장 무용한 가식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요즘과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루라도 빨리 내란 세력들이 처벌되고 안전한 일상을 되찾고 싶은 평범한 시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언론은 다른 무슨 기발한 기삿거리를 찾기보다 내란 세력의 처벌이라는 의제를 유지하고 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의 입장에서 내란 세력의 해소가 전제되지 않은 차기 대통령 선거나 개헌 등의 새로운 기삿거리들은 모두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허위 의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본적 원인이 되는 내란 세력을 해소하는 것이 일상과 민생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셈 빠른 언론들은 벌써 앞으로 있을 몇개월 뒤를 생각하기 바쁠지도 모르겠지만, 혼란스러운 길에서는 어디에서 시작했는지를 기억해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날 보여준 것처럼 당연하게도, 내란과 민주주의 사이에서 우리에게 무슨 중립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계엄 선언 뒤 우리 언론이 보여준 용기 있고 빛나는 모습이 너무 빨리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