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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 (일)

200권 옮겼다, 여전히 세가지 꿈을 이뤄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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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종대 번역가가 지난 13일 경기도 파주의 한길사 사무실에서 최근 펴낸 앙겔라 메르켈의 ‘자유’를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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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 중 간첩조작사건으로 옥고
생계로 번역 시작했으나 천직 돼
살아있는 사전·독일어 성경 옮기고파



“이 시국에 한가하게 인터뷰를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시국이라서 꼭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두 번째 탄핵 표결을 앞둔 지난 13일 찾아간 박종대 번역가는 “계엄사태로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일상이 무너졌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약 30년간 200여권의 독일 문학과 인문교양서 등을 우리말로 옮긴 노장 번역가의 번역 인생 출발선에 시국사건이 있었다. 1994년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학계와 유학계 배후에도 북한이 있다’는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의 매카시즘적 도발로 독일 유학생들이 줄줄이 간첩조작사건으로 잡혀 들어갔다.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박사 논문을 쓰던 그도 아버님의 칠순 잔치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안기부에 끌려갔다. 검찰은 10여 가지 혐의를 갖다 댔는데, 그중에는 다 읽은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을 독일 교포에게 건네준 것이 ‘국가기밀누설죄’로 적시돼 있었다. 당시 ‘한겨레21’은 이 사건을 다루면서 독자들에게 ‘당신은 지금 국가기밀을 읽고 있다’고 꼬집었다.



1년반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 그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었다. 안기부의 감시로 다시 독일로 갈 수도 없었고, 취업하기에도 나이가 많았다. 그때 한 후배가 번역을 권유하며 책을 건넸다. “생계 문제가 목전의 비수처럼 다가왔는데, 번역이 손을 내밀어서 그 손을 잡았죠.”



번역은 처음부터 적성에 딱 맞았다. “번역가는 2∼3개월에 한번씩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만나잖아요. 작가가 수년 또는 평생에 걸쳐 쓴 작품을 몇 개월에 걸쳐 번역하면서 작가의 사고과정과 글쓰기 과정을 추체험하는 거죠. 그게 번역의 기쁨입니다. 하지만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라틴어에서도 번역과 반역은 철자 하나만 달라요.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번역의 슬픔이죠.”



원문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번역으로 출판사들이 믿고 맡기는 번역가로 작품목록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서 생겨난 꿈이 세 가지 있었다. 한 가지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문학 작품을 하나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지난해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를 펴내면서 그 꿈을 이뤘어요.” 무질은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 20세기 3대 모더니즘 작가로 꼽히며, 박 번역가의 석사·박사과정 전공이기도 했다. “시국사건으로 박사 논문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늘 일단락 짓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번역을 통해 개인적으로나 문학사적으로나 의미 있는 출간을 하게 됐죠.”



두 번째 꿈은 사전을 번역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전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번역한 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져서 우리와 맞지 않는 표현들이 남아 있어요. 우리가 쓰는 문장에 바로 대입해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단어들이 많죠. 저는 그걸 ‘죽은 사전’이라고 봐요. 저는 기존의 사전에 잘못 나와 있는 단어들을 적합한 말들로 바꿔놓은 저만의 사전을 만들어서 쓰고 있어요. 어떤 단어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문장의 결이 달라지고 호흡이 달라집니다. 사전은 문명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가장 잘 드러내는 축적된 지식의 보고입니다. 현장에서 오래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있는 사전을 번역해보고 싶어요.”



세 번째 꿈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과거 성경은 라틴어로 쓰여 있어서 귀족과 성직자, 지식인 외에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누구나 읽게 만듦으로써 종교 개혁이 가능했다. “한국어 성경이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비문과 고리타분한 표현이 많아요. 독일어 성경은 그렇지 않거든요. 성경은 신앙과 상관없이 하나의 이야기책으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텍스트잖아요. 지식의 민주화, 종교의 합리화 과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번역하고 싶어요.”



그는 번역 외에 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에 소속돼 작가들과 교류도 하고 ‘우리국가’ 회원 모집에도 열성이다. “우리가 국가를 선택해서 태어날 순 없지만, 내가 살고 싶은 국가를 마음속에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 제 마음속에 만들어서 품고 있는 국가가 하나 있어요. 이름은 ‘우리국가’고요.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전파하고 있는데, 지금 이 국가에 들어온 사람들이 11명이에요. 상상 속에서 체제와 시스템을 계속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 업데이트할 때마다 회원들에게 알려주죠.”



시국사건으로 예기치 않은 삶의 갈림길에 들어섰던 그에게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듯했다. “가까이서 보면 역사의 퇴보로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진보라고 생각해요. 20∼30대의 민주의식과 군인들의 망설임과 부끄러움 속에 우리 안에 민주주의가 공기처럼 스며들어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민주적 시민의식을 키우는 큰 계기가 됐다고 봐요.”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한겨레

특성 없는 남자 1∼3



20세기 초 주인공을 통해 당대를 풍미한 사상들-과학철학, 군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사유소설의 정수다. 박 번역가는 “서양의 유명 지식인이 쓴 책에는 꼭 언급된 아우라가 있는 책으로 니체가 철학을 문학적으로 했다면 무질은 문학을 철학적으로 했다”고 말했다.



로베르트 무질 l 문학동네(2023)





한겨레

자유



독일 최초 여성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의 회고록으로 동독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부터 총리로서 겪어낸 숱한 경제·정치적 격랑의 이면을 상세히 전한다. 박 번역가는 “더디게 나아가더라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내는, 기본기를 충실히 지킨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앙겔라 메르켈 l 한길사(2024)



한겨레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17세기 스페인을 배경으로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상상력을 접목한 팩션 형식의 작품으로 벨라스케스의 그림 ‘라스 메니나스'에서 실마리를 얻은 소설이다. 박 번역가는 “인권과 장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로 청소년 권장소설로 많이 뽑힌다”고 추천했다.



라헐 판 코헤이 l 사계절(2017)



한겨레

어느 독일인의 삶



독일 나치 선전부 장관 괴벨스의 비서로 일했던 여성의 회고록으로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통찰하게 한다. “우리가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외면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며, 부당한 명령에 대해선 민주시민으로서 진지하게 의심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각성하게 만든다.”



브룬힐데 폼젤 l 열린책들(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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