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를 위협하면서 국내 산업계가 내년 비상경영 채비에 나섰다. 상반기와 비교해 하반기에만 환율이 10% 이상 오르면서 환율 리스크가 기업이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강달러=수출호재'라는 과거의 공식이 깨진 상황에서 환율의 가파른 상승은 유가상승, 원자재 수입가격 상승, 해외 투자 비용 증가 등 기업의 수익성 악화를 초래한다. 내수침체로 고전하는 상황에서 원가인상 압박까지 더해지면 내년 초부터 전자제품, 자동차, 항공료 등의 도미노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9일 반도체, 자동차, 항공 등 산업계는 환율이 1500원대로 치솟으면서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원달러 환율은 지난 3월 1311원에서 지난 27일 1474원에서 12.4% 상승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환차익으로 수출기업들의 수익성이 단기적으로 좋았지만 지금은 수출선 다변화로 달러외 결제 비중이 늘어나 이 같은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면서 "대기업은 수출 대신 해외 현지 투자 및 생산이 늘었고, 원자재 수입과 마케팅 비용도 대부분 달러로 결제돼 지금같은 강달러 분위기가 지속되면 기업들의 비용 증가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환율 리스크 확대가 가장 큰 업종은 반도체와 자동차다. 반도체 업계는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당장은 제품을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지만, 장기화되면 웨이퍼 등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이 올라 수익성을 저하한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에 대규모 공장을 짓고 있는 만큼 강달러 추세가 장기화하면 시설 투자 및 장비·설비 반입 비용이 많이 늘어난다.
자동차 업계 역시 해외 생산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 강달러 수혜가 크지 않다. 환율 상승분 중 일부는 부품, 원자재 비용이나 현지 마케팅 비용 등으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쉐보레, 스텔란티스, 테슬라 등 수입차업계는 계약 시 약정해놓은 달러 금액으로 대금을 지급해야해 환율 상승이 수입차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내년 신차 출시를 앞둔 수입차업계에서는 가격 결정에 고심이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유가에 민감한 항공사들은 달러가 강세일 경우 해외 현지에서 사용하는 부담이 높아지고, 외화환산 손실 규모도 늘어날 수 있다. 대한항공의 경우 올해 상반기 말 기준 순외화부채는 약 28억달러로, 환율이 10원 오르면 약 280억원의 외화평가 손실이 발생한다.
해운 기업들도 고환율 기조가 해상운임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이러한 수혜는 유가 상승에 따라 반감될 수도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업계도 미국에 배터리 공장 신·증설을 활발하게 하고 있어 강달러로 투자액 부담이 가중된다.
전문가들은 원화 가치 하락이 1년 내내 이어지면서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분석에 따르면 원화의 실질 가치를 나타내는 실질실효환율이 10% 하락(환율상승)하면 대규모 기업집단의 영업이익률은 0.29%포인트(P) 하락한다.
대기업들이 최근 가격보다 기술 경쟁에 집중하면서 환율 상승에 따른 매출 증대 효과는 크지 않은 반면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인한 비용 증가는 영업이익을 유의미하게 줄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환율 방어를 위한 외환보유액 소진은 외환위기 발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관계자는 "대외신인도 관리 강화, 외환 수급 안정, 금융안전망 강화 등 다각적인 대응 노력이 필요하다"며 "통화정책보다는 금융정책·외환시장 개입 등을 통해 우선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주경제=한지연 기자 hanji@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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