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캐롤라이나 목스빌의 힌턴 헬퍼 생가에 서 있는 안내 표지판. 헬퍼는 미국 반노예제 운동사의 독특한 한 챕터를 채우고 있다. dncr.nc.g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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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힌턴 헬퍼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로원 카운티의 한 소농장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주립 대학격인 ‘목스빌(Mocksville)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1850년 뉴욕으로, 골드러시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두루 현실을 경험한 그는 1855년 노다지의 허실을 경고한 책 ’황금의 땅’을 출간해 이름을 알렸다.
그는 휴머니즘이나 윤리적 차원의 노예제 반대론자가 아니었다. 그가 '임박한 남부의 위기'를 쓴 것은 대농장에서 노예들을 부리며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극소수 지주들의 존재가 중하층 백인들의 노동 기회를 박탈하고 경제 성장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는 데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1850년 전미 인구산업총조사는 그 분노가 정당하다는 물증이 됐다. 그는 1850년 기준 토지 1에이커(약 1,224평)의 경제적 가치가 북부는 28.07달러인 반면 남부는 5.34달러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며 “남부 대농장 노예 소유주들은 저 차액(22.73달러)만큼의 빚을 우리에게 지우고 있는 셈”이라고 썼다.
양키가 아닌 남부 토박이가 내민 반노예제 의제는 수많은 남부인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186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에겐 민주당 텃밭 남부의 지주와 시민들을 분열시킬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됐다. 남부 일부 주는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공화당은 책 요약본 10만 부를 제작해 배포했다. 대통령이 된 링컨은 1861년 헬퍼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미국 영사로 임명함으로써 그에 대한 정치적 빚을 갚았다.
66년 귀국한 헬퍼는 대농장주들처럼 이제는 해방 노예와 이민자들이 백인 노동자들의 기회를 빼앗아 간다며 일련의 책과 팸플릿 등으로 유색인종 이민자 추방과 원주민 박해 등을 촉구했지만, 당시엔 거기 적극 동조한 정치인이 없었다. 그는 고립과 가난을 견디다 190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이 퇴행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어떤 이들은 헬퍼를 '시대를 앞서 산 인물'이라고 평할지 모른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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