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1.02 (목)

'낮고 약하게' 설치 규정과 딴판...정부도 '콘크리트 둔덕' 참사 원인 주목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사고기가 착지 후 충돌한 로컬라이저 설비
4m 안팎 둔덕에 콘크리트 구조물 심어 건설
국제 규정은 ①부러지기 쉽고 ②낮게 만들어야
당국, 미국 NTSB와 블랙박스 점검 시작
국내 도입한 사고기 737-800 기종 전수 검사
한국일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발생 이틀째인 30일 울산시의회 시민홀에 분향소가 마련돼 있다. 뉴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남 무안군 무안국제공항에 설치된 구조물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피해를 키웠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고기가 착지 후 처음 충돌한 로컬라이저(착륙 유도 안전시설)가 국제 규정과 달리 단단하게 건설됐다는 지적이다. 당국도 시설물 규정과 해외 사례 검토에 착수했다.

30일 중앙사고수습본부에 따르면 로컬라이저는 활주로 끝에 설치하는 설비로, 항공기에 신호를 보내 활주로 위치를 알리는 장치다. 한국이 당사국으로 따르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규정 등에 따르면 '활주로와 그 인접 안전지역'에 설치되는 물체나 시설은 충돌 시 항공기에 치명적 손상을 유발하지 않도록 쉽게 부서지거나 변형될 수 있는 재질이어야 한다. 또 필요한 경우 최소 높이·중량으로 설계해야 한다. 공항안전운영기준에도 활주로종단안전구역과 관련, ‘설치가 허가된 물체는 지지하는 기초구조물이 지반보다 7.5㎝ 이상 높지 않아야 하며, 물체는 부러지기 쉬운 구조로 세워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활주로종단안전구역은 항공기 손상을 줄이려고 활주로 뒤에 설정하는 구역이다.
한국일보

30일 전남 무안군 무안국제공항 활주로 인근의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이 전날 제주항공 여객기와의 충돌 여파로 파손돼 있다. 육안으로도 콘크리트 두께가 1m 안팎은 돼 보인다. 무안=박시몬 기자 simon@hankookilbo.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사고기가 충돌한 로컬라이저가 이런 규정 등에 반하는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문제의 로컬라이저는 흙을 쌓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심은 둔덕 형태였다. 육안으로도 둔덕 높이는 4m 안팎, 콘크리트 구조물 두께도 1m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로컬라이저는 무안공항 활주로 양끝에 모두 설치돼 있다. 사고기가 충돌한 로컬라이저는 활주로 남측 끝단으로부터 251m 지점에 있었다.

권보헌 극동대 항공안전관리학과 교수는 “(로컬라이저가 단단한 구조물이어서) 그 부분 때문에 안타깝게도 사고가 크게 난 것 같다”면서 “영상을 보면 사고기가 부러지지 않고 활주로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다 둔덕에 부딪히며 화염에 휩싸이고 폭발했다”고 지적했다. 만약 규정대로 낮은 높이에 부러지기 쉬운 구조였다면 항공기가 폭발 없이 밀고 나가 정지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해외에서도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영국 공군 출신 항공 전문가 데이비드 리어마운트는 30일(현지시간) 영국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항공기가 엄청나게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히면서 화염에 휩싸였고 그것으로 인해 탑승자들이 목숨을 잃었다"며 "원래라면 그런 단단한 구조물이 있으면 안 되는 위치"라고 주장했다.

항공당국은 실제 로컬라이저가 막대한 피해를 야기했는지 면밀히 살펴본다는 방침이다. 주종완 국토부 항공정책실장은 이날 "만약 콘크리트 구조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등은 향후 조사를 통해 파악하겠다"고 밝혔다. 국토부에 따르면 제주국제공항은 콘크리트와 철골(H빔), 여수·포항경주 공항은 흙을 쌓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했다. 해외 공항으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국제공항 등 3곳이 확인됐다. 인천국제공항 로컬라이저는 구조물 대부분이 평지에 매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무안국제공항 관계자는 "규정 위반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한국일보

중앙사고수습본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고 발생 후 하루가 지나는 동안 사고 정황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고기는 전날 오전 8시 54분 무안국제공항으로부터 활주로 1번 방향으로 착륙 허가를 받았고 활주로에 접근했다. ②3분 뒤 관제탑의 조류 충돌 주의 조언을 받았고, ③8시 59분에 조종사가 “조류 충돌!”이라고 비상을 선언하고 복행을 관제탑에 통보했다. ④사고기는 9시 왼쪽으로 기수를 틀어 활주로 위를 벗어났다. ⑤사고기는 오른쪽으로 선회해 다시 착륙을 시도했고 9시 1분 착륙 허가를 받았다. 앞서 착륙에 실패해 벗어난 활주로를 반대 방향(활주로 19번 방향)에서 재진입한 것이다. ⑥9시 2분 통상적 착지점(터치다운존)을 지나친 지점에 동체로 착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1분 뒤에는 로컬라이저에 충돌했다.

사고의 첫 원인은 조류 충돌일 가능성이 유력하지만 의문이 여전히 많다. 먼저 조류 충돌로 정확히 어떤 고장이 발생했는지 파악해야 한다. 사고기가 활주로를 완전히 선회하지 않고 반 바퀴만 선회해 활주로 중간에 착지한 이유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또 랜딩기어(착륙장치) 3개가 작동하지 않은 이유도 밝혀야 한다. 조류 충돌로 랜딩기어를 작동시키는 유압설비(계통)가 고장났더라도 전자적 방식이나 수동 방식으로 랜딩기어를 작동할 수 있다. 김규왕 한서대 비행교육원장은 “유압계통이 고장나면 조종사의 조종간 조작에 힘이 많이 든다”며 "단시간에 랜딩기어를 작동시키기 어렵게 된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30일 전남 무안군 무안국제공항 활주로 인근의 방위각 시설(로컬라이저)이 전날 제주항공 여객기와의 충돌 여파로 파손돼 있다. 무안=박시몬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고 원인 규명은 블랙박스 분석에 달렸다. 블랙박스는 교신 등을 기록한 음성기록장치(CVR)와 기체 상태를 기록한 비행기록장치(FDR)로 구성된다. 사고기 CVR은 온전하지만 FDR은 분석용 기기와 연결할 커넥터(접속부)가 사라졌다. 블랙박스가 훼손돼 분석이 어려우면 정보 해독과 결과 발표에 6개월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미국 교통안전위원회(NTSB)에 블랙박스를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당국은 사고 현장에서 수거한 블랙박스를 이날 서울 김포국제공항 시험분석센터로 옮겼다. 조사에는 NTSB와 사고기 제조사 보잉 관계자 총 4명이 참여하기로 했다. 사고기와 같은 보잉 737-800 기종에 대해 전수 특별점검도 추진한다. 이 기종은 국내 저비용항공사(LCC)가 주로 사용하는 항공기다. 제주항공이 39대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고, 티웨이항공 27대, 진에어 19대, 이스타항공 10대, 에어인천 4대, 대한항공 2대 등 총 101대가 운항 중이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문지수 기자 door@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