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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목)

박정희 인권 문제 삼고 김일성 만나 핵 담판 ‘평화 중재자’ [고인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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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100세…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

퇴임 후 ‘카터센터’ 만들어 봉사

주거 개선 ‘해비타트’ 널리 알려

‘사형 선고’ 김대중 구명 나서고

여러 분쟁 중재… 노벨평화상도

마크롱 “취약한 이들의 옹호자”

시진핑 “미·중 수교 등 교류 공헌”

100세의 나이로 29일(현지시간)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분쟁 중재자, 봉사활동 등으로 퇴임 이후 더 주목받았으며 전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또 재임 시와 퇴임 시를 통틀어 수십년간 한반도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미국 대통령으로 꼽힌다.

한반도와 그의 인연은 그가 1976년 6월 23일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터 전 대통령은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하의 한국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주한미군 철수론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1977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같은 해 3월 주한미군을 4∼5년 안에 단계적으로 철군시키고 전술핵무기까지 철수한다는 세부 계획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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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 시절뿐 아니라 퇴임 이후에도 한반도를 비롯한 여러 분쟁지역에서의 평화운동에 적극 나섰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인 1979년 한국을 찾아 박정희 대통령과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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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뒤 공개된 미국 외교 문서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의 첫 방한으로 1979년 6월 29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선 주한미군 철수 문제, 한국 인권 문제 등을 놓고 한·미 정상 간 격한 설전이 빚어졌다.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암스트롱 보고서’가 나오면서 카터 행정부는 철군 계획을 보류했으나 박정희 정부에 인권개선과 민주화를 지속해서 압박했다.

다만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이후 신군부의 집권을 사실상 묵인한 것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그는 퇴임 이후인 1980년대 초엔 신군부 치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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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전 대통령이 1994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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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6월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거부한 이후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북핵 문제에 대해 담판을 짓겠다며 빌 클린턴 행정부에 방북 승인을 요청해 평양으로 갔다. 그는 1994년 6월 15일부터 3박 4일간 평양에 머물며 김 주석과 두 차례 면담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평양을 떠난 뒤 서울을 방문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김 주석의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만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의 전도사로 주목받았지만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압박 행보에 보조를 맞추지 않고 돌출 행동을 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16년 뒤인 2010년 8월 카터 전 대통령은 다시 방북했다. 8년의 노동교화형을 받고 북한에 복역 중이던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의 석방을 위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승인을 얻고 평양을 방문한 것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곰즈의 사면을 끌어내며 그와 함께 귀환했지만, 방북 사흘 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천안함 폭침 이듬해인 2011년 4월 ‘디 엘더스’(The Elders) 소속 전직 국가수반 3명과 함께 다시 북한을 방문했으나 김정일 위원장과는 이때도 면담하지 못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2017년 10월에도 한반도 전쟁 위기론이 고조되자 워싱턴포스트(WP)에 글을 기고해 고위급 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하라고 촉구했다. 당시 현직이었던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에게 방북 의사를 전달했지만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퇴임 다음 해인 1982년 설립한 카터 센터를 통해 봉사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특히 열악한 주거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돕는 봉사단체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 활동이 널리 알려졌다. 2001년 8월엔 한국을 방문해 해비타트 운동에 직접 참가한 바 있다. 또 여러 분쟁 지역에서 평화 중재자로 나서며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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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뒤 봉사활동에도 헌신적으로 나섰던 카터 전 대통령이 2007년 부인인 로절린 여사와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무주택자의 주거공간 확보를 위한 국제 NGO단체인 ‘해비타트’의 집짓기 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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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세계 각국의 애도가 잇따랐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3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조전을 통해 “카터 전 대통령은 중미 수교의 추동자이자 결정자로, 장기간 중미 관계 발전과 양국의 우호 교류·협력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면서 “그의 별세에 깊은 애석함을 느낀다”고 밝혔고,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카터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깊은 슬픔에 휩싸였다”는 담화를 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성명을 내고 “수십년간 공익을 위해 봉사해온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전 생애 동안 지미 카터는 가장 취약한 이들의 권리를 변함없이 지켜온 옹호자였다”며 고인을 기렸다.

워싱턴·베이징=홍주형·이우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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