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곤 편집인 |
202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이재명 후보를 잘 모르고 투표했다. 두 사람의 국가 비전은 고사하고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이렇게 헷갈리는 대선후보를 본 적이 없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 대통령은 실체가 분명해졌다. 자유를 외쳤지만 위험천만한 지도자였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근사한 말에 현혹돼 온 국민이 속았다.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윤 대통령은 지금도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통령은 통치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 법리를 떠나 무장 군인에게 발포 명령까지 한 것을 누가 납득하겠나.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사회는 그를 민주주의를 파괴한 인물로 낙인찍었다.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돼 윤 대통령이 복귀한다면? 전 세계가 한국 민주주의에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원화 값은 더 떨어지고, 길에서 군인만 마주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을까. 자칫 유혈사태로 번질 우려도 있다. 윤 대통령은 통치 능력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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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앞서 탄핵 끝내려 과격해져
국가 리더십 공백은 여야 공동책임
자기정치 버리고 개헌 논의 나서야
포퓰리즘·강성 팬덤·586 정비하길
결국 조기 대선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사법 리스크가 있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유리한 입장이다. 국민의힘 돌아가는 꼴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문제는 이 대표의 실체를 아직도 잘 모른다는 점이다. 난세의 영웅인가, 거짓말쟁이 범법자인가. 대한민국을 되살릴 적임자라는 믿음을 주지 못한다. 유튜버 김어준이 ‘계엄군 암살조’를 얘기하자 이 대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집단”이라고 덥석 받았다. 확인도 안 해보고 가짜뉴스에 올라탄 셈이다. 김어준류와 뭐가 다른가. 이달 중순 갤럽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7%가 이 대표를 선호했으나 35%는 의견을 유보했다. 불안하게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이 대표는 계엄 사태 후에도 자기 정치에 몰두했다. 탄핵 절차를 재촉하고, 자신의 재판 일정은 늦추며 ‘날짜 계산’에 여념이 없다. 윤 대통령이 버티기로 나가자 조급해졌다. 탄핵부터 먼저 끝내기 위해 정부를 쉴 새 없이 몰아붙인다. 엊그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으로 국정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 대표는 나라 걱정은 뒤로하고, “반란 세력을 일망타진하라”며 공세 수위를 높였다. 뉴욕타임스는 “누가 한국의 정부와 군을 책임지는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국가 리더십에 공백이 생기면 이 대표가 공동 책임을 진다는 점을 잊은 듯하다.
국민은 이 대표가 사태를 키우는지, 수습하는지 지켜보고 있다. 자신만 살겠다고 작은 싸움에 매달리는지, 소명의식을 갖고 큰 정치를 하는지 보고 있다. ‘이 대표에게 나라를 맡기면 큰일 난다’는 우려를 씻으려면 해야 할 일이 있다.
첫째, 봇물 터진 개헌 논의를 외면해선 안 된다. 이 대표는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대통령 고지가 보이는데, 물타기도 아니고 ‘개헌이 웬 말이냐’고 여기는 듯하다. “개헌은 여당의 지연 전략”이라는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의 발언에서 속내가 드러난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87년 체제’가 수명을 다한 게 분명해졌다. 40년 가까운 시대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대통령 권한이 너무 크고, 승자가 권력을 독식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드러난 지금이 국가 지배구조를 개편할 적기다. 마침 이 대표만 결심하면 가능한 상황이 됐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기회다.
둘째, 민주당 정책 정비가 시급하다. 이념에 기반을 둔 586(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정책과 이 대표 특유의 포퓰리즘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586 정책은 탈원전, 주 52시간 근무제, 공공부문 확대, 상법 개정, 노란봉투법 등이 있다. 포퓰리즘은 전 국민 대상의 ‘기본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양곡관리법도 여기에 속한다. 기업을 옥죄고, 재정을 쏟아붓는다. 언뜻 보기에 ‘착한 정책’ 같지만, 시장을 훼손하고 성장 동력을 망가뜨려 취약계층에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 지난 정부 소득주도성장에서 실패를 경험했다.
586 정책과 포퓰리즘을 거둬내야 한다. 다행히 이 대표가 문재인 전 대통령처럼 꽉 막히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달 “성장이 곧 복지”라고 말했다. 지난봄에는 소득대체율을 낮추고 보험료율을 올리는 연금개혁의 큰 방향에 동의했다. 이 대표의 멘토인 이한주 민주연구원장은 “최저임금 인상은 과속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념에 함몰되지 않고, 유연한 게 이 대표의 장점이다. 그걸 살려야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다.
셋째, ‘개딸’(개혁의딸)로 불리는 강성 팬덤을 멀리해야 한다. 최근 이 대표가 20만 명 팬카페인 ‘재명이네 마을’ 이장직을 내려놓았다. 팬덤까지 챙길 여력이 없는 것 같다. 차제에 정리했으면 한다. 초심을 잃은 운동권 586과도 거리를 두는 게 맞다. 586은 386, 486을 거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쟁취하는 탐욕스러운 기득권으로 변질됐다. 이 대표는 독자 행보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586에 빚진 게 없는 만큼 눈치 볼 게 없다. 국운이 기울면서 ‘지도자 복이 없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대한민국은 위기다. 이 대표도 시험대에 올랐다.
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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