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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 (금)

[글로벌포커스] 충동 정치 막는 경제 실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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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우리나라의 발전 경험은 과연 중동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최근 이를 직접 체감할 기회를 얻었다. 지난 12월 카타르에서 중동 최대 규모의 글로벌 현안 회의인 도하포럼이 열렸다. 이번에는 포럼 역사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싱크탱크가 독자 패널을 만들었다. 제주평화연구원(원장 강영훈)이 포럼의 첫 한국 파트너로 조직한 '중동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의 역할' 패널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청중은 원조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한 세계 10위 경제 대국 한국이 중동의 안정과 재건에 발휘할 저력에 주목하고 기대했다. 지금 한국에서 폭주하는 과도한 정치적 열정과 이로 비롯된 혼란은 스쳐 지나갈 해프닝이 아니겠냐고 했다. 어쩌면 포럼의 주최국 카타르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등 걸프 산유국 청중은 현재 국시로 삼는 경제 실용주의를 한국의 현실에 투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들 은 국가 체질 개선을 목표로 전례 없는 경제 개혁과 사회 개방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들 산유국은 혁신의 롤모델로 삼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했다. 전통 가치를 지키면서도 놀라운 시장경제 발전을 이뤘고 나아가 평화적인 정치 이행까지 달성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최근 방산 수입처도 주변의 튀르키예나 이스라엘 대신 공격적이거나 팽창주의적 요소가 덜한 한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냉전 시기 아랍 세계에서는 아랍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이슬람 급진주의 등 대립적인 정치 슬로건이 난무하는 가운데 국왕과 대통령, 야당 수장이 암살당하고 정당과 조직 구성원들이 숱하게 목숨을 잃는 야만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폭력은 분쟁으로 커졌고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이 넘쳐났다. 2011년엔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 장기 독재정권이 잇달아 무너졌으나 곧 쿠데타나 내전이 이어졌다.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핏대를 높이던 정치인들은 안전하고 잘사는 나라가 아닌 처단과 응징의 공포가 가득 찬 무질서의 거리로 시민들을 내몰았다.

이때 걸프 산유국들은 새로운 길을 찾는다며 개혁개방을 깜짝 선언했다. 물론 목적은 정치 세력의 우발적 충동으로 정권이 흔들리는 것을 미리 막고 왕실을 보호하는 것이다. 미국 본토를 공격한 9·11 테러범 대부분은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출신의 알카에다 조직원이었다. 이후 알카에다는 친서구 정책을 펼친 사우디 정부를 정조준해 수도 리야드에서 폭탄 테러와 총격전을 벌였다. 아랍의 봄 혁명 이후에는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인 무슬림 형제단이 역내에서 영향력을 뻗어나갔다. 산유국들은 냉철한 경제 실용주의에 기대야 했다. 급변하는 세계 경제 환경에 맞춰 석유 의존 산업을 다각화하고 이슬람 체제를 개혁해 시장을 활성화했다. 시민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나아지면서 경제활동을 방해하는 정치 선동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이들 걸프 산유국에는 이집트, 레바논, 팔레스타인 등 주변국 출신이 많이 일하고 있어 개인의 경제 이익을 지키고 정치 불안정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이웃 나라로도 퍼져 갔다.

몽테스키외는 저서 '법의 정신'에서 부드러운 상업의 힘이 야만을 길들인다고 했다. 파괴적인 이념 정치의 광풍을 막아 세운 합리적인 경제적 계산이 한국을 풍요로운 민주주의로 이끌었다. 제주평화연구원의 한국 패널에서 만난 중동 참가자들의 뜨거운 관심은 우리 미래를 향한 그들의 낙관을 느끼게 했다. 한 차례 광풍이 훑고 지나간 우리나라는 숨 고르기에 들어간 듯하다. 지금껏 심사숙고한 국민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한국을 중동 국가의 길라잡이로 다시 우뚝 일어서게 할 것을 믿는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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