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1.04 (토)

[다문화칼럼함께하는세상] ‘함께’가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세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희 엄마는 씩씩하다. 10여 년을 다니던 의류회사가 사장님의 질병으로 폐업했으나 사모님과 둘이 창고 정리까지 마무리하고 의연한 표정으로 센터에 왔다.

육아를 병행할 수 있도록 근무시간을 배려해 주고, 캄보디아 사람인 자신에게 의류 제작에 필요한 미싱, 오버로크, 상침 등의 기술을 다 익히도록 지도해준 사장님 내외가 고맙다고 했다. 덕분에 60대 이상 한국인 미싱사만 예닐곱 남은 공장에서 제일 젊고 기술력을 갖춘 자신이 제품마다 제작 방법을 지도하고 반품이 안 나도록 마무리하는 역할을 했다고 뿌듯해했다. 실업급여 좀 받아보고 다시 취업할 생각이라고 농담처럼 말하는데 어찌나 의젓하고 대견한지 등을 두드려줬다. 영희 엄마와 사장님 내외가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았던 세월을 간단히 말하면 사회통합과 세대통합이라 해야 하려나.

철수 엄마는 느리다. 10년 가까이 한국에 살았는데 아직 한국어가 서툴다. 일솜씨로 봐서는 좀 더 어려운 부서로 옮겨도 될 것 같은데 계속 단순 수작업 부서에서만 머물고 있다. 자활 의지가 없는 것 아닌가, 의심도 받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고령의 남편과 자라나는 아이를 생각하면 한국어 의사소통이 절실하다고 여긴 자활후견기관에서 주 1회 한국어 공부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갈 길이 멀다. 한국어 습득부터 아이와 남편 돌봄까지 개인의 과제에 막혀 있으니 더 많은 걸 기대할 수 없다. 등을 토닥이며 위로와 용기를 줘야 할 형편이다.

지난해 말 서울시 공무원이 내방했다. 구로구는 이주민 밀집 지역이니 학생들이 서로 통합할 수 있도록 중국어 교실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했다. 어른들은 이주민이 선주민에게 중국 음식을 알려주는 건 어떠냐고 했다. 밀집 지역일수록 선주민과 분리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던 것 같다. 프로그램에 대한 매력으로 서로 접촉할 일이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관심은 희박했고 프로그램은 더 진행되지 못했다고 그렇게 단순한 이론으로 될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17세기 튀르키예를 배경으로 한 오르한 파무크의 소설 ‘하얀방’에는 튀르키예와 이탈리아 남성이 주종관계로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동서양 문명의 차이에서 오는 부러움과 무시, 주종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타협으로 수없이 논쟁하며 공생한다. 공존의 세월을 뜨겁게 거쳐서인지 위기의 순간 이탈리아 노예를 살리기 위해 국적을 비롯한 존재 자체를 바꾸어 상대방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소설이라 가능한 극적인 통합이다. 가슴에 와 닿았던 건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겪어내는 감정들이다. 고상하지 않다. 유치하기 그지없다. 이국적인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건 실익과 감정, 정체성을 건드리는 미세한 생활영역이다. 이 유치함을 회피하지 않아서 단련된 것 같다.

세계일보

정종운 서울 구로구가족센터장


2025년이 열렸다. 다문화사회로 불리는 21세기가 분기점에 이르니 사회통합이란 주제가 무겁게 다가온다. 서울시 공무원의 제안처럼 이주민에 대한 인식개선도 이어져야 한다. 영희 엄마와 철수 엄마처럼 각기 다른 역량과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겪어내는 생활영역의 통합도 계속돼야 한다. 함께 먹고사는 생활영역의 통합이 근사하고 감동적이기만 할까?

유치하고 피곤해도 잘 소화해 보자. 우리에게 그간 쌓인 세계시민의 역량을 믿으면서.

정종운 서울 구로구가족센터장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