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흥행작의 위력은 역시 어마어마했다. 지난달 26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2가 공개된 후 시청자 반응이 쓰나미처럼 쏟아지고 있다. 평가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이 중 7화에 대한 당혹감이 눈에 띈다. 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황동혁 감독은 이런 반응을 보며 “약간 슬펐다”고 말했다. 이상 추구와 연대의식이 희미해진 현 시대를 역으로 보여주는 듯 해서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각본을 직접 쓴 황 감독은 “성기훈(이정재)은 몽상가·돈키호테 같은 인물로, 혼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며 “시즌2에서는 이런 선한 의도와 신념이 어떻게 좌절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기훈이 선거라는 제도 내에서 게임 참가자들을 다 데리고 나가려 노력하지만 실패하죠. 마지막에 꺼내든 카드가 무모한 반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중요한 건 성기훈이 목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기 신념과 의도를 잃고 변해간다는 거예요. 기훈은 역사 속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려던 이들이 겪은 일들을 보여주는 인물이에요.”
기훈의 반란에는 ‘극소수’만 가담한다. 나머지 대다수는 내 이익에 손해될 짓을 하지 않는다. 실패가 예고된 시작이었다. 황 감독은 “예전 같으면 사회 변화를 위해 모두 들고 일어났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며 “하나의 이념·깃발·신념이 사라진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런 의도는 빗나갔다. 시청자는 패배가 뻔한 일에 극소수가 가담하는 것조차 납득하지 못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 작품이 1980·90년대에 나왔으면 기훈의 반란을 보는 게 또 달랐을 것 같아요. 지금 세상에 나오니 ‘왜 저러는 거야 쟤들’ 이런 반응이…. 저도 이번에 엄청난 차이를 새로 느꼈습니다. 대의, 모두가 잘 사는 길, 이념 이런 게 다 사라졌구나. 이상을 쫓는 몽상가들을 바보같고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황 감독은 “그만큼 살기 힘들고 하루하루 고통스러워, 헛꿈을 쫓는 사람들이 어이없어 보이는 세상이 됐다는 게 안타깝고 슬프다”고 했다. 그는 “너무너무 힘들어진 게 우리 서로 때문이 아니라, 이 시스템을 만들고 권력을 쭉 누려온 사람들 탓인 것 같은데 다들 위로 분노를 향하기보다 옆·아래로 손가락질하는 세상”이라며 “그럴수록 손가락질을 위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런 바람을 기훈의 행보에 투영했다.
‘오징어 게임’ 시즌2는 공개 이후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글로벌 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시즌2는 이달 4일까지 넷플릭스 전 세계 TV쇼 부문에서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 결과를 얻기까지 황 감독은 “엄청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한다. 각본을 쓸 때부터 촬영·편집·홍보 매 시기마다 “잘 될 것 같았다가 어떤 날은 ‘완전히 망하는 거 아니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가 ‘아니야 그래도 이건 재밌어, 이거보다 재미있는 게 어디 있어’ 혼자 중얼중얼”하는 날이 이어졌다. 공개 직후 국내외에서 쏟아진 반응을 보면서도 햄릿에 버금가는 고민은 계속됐다. “이거 망했나, 아니야 잘 되나, 좋아하나, 싫어하나.”
애끓었던 날만큼 시즌2의 장면장면에는 황 감독의 의도와 철학이 일일이 투영됐다. 1화에서 ‘딱지맨’(공유)이 노숙인에게 빵과 복권 중 고르게 하는 장면은 현대의 상대적 빈곤과 불안감을 풍자하려 넣었다.
“절대적 빈곤층은 줄었지만 상대적 빈곤감이 너무 커진 세상이에요. 누구나 빵 한 덩이 정도는 갖고 살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여기에 절대 만족할 수 없어요.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더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불안감을 느껴서 일확천금을 쫓게 만드는 게 지금 세상이예요.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 그래서 어느 누구도 빵 하나에 만족하지는 않는 세상이 돼버린 것 같아요. 이런 세태에 대한 풍자로 이 장면을 넣어 봤어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게임을 계속할지 나갈지 정하는 ‘OX 투표’도 비슷한 맥락에서 황인호(프론트맨·이병헌)가 만들었으리라 설정했다. 상금을 갖고 탈출할 기회를 줘도 사람들은 욕망에 눈멀어 ‘한 게임 더’를 외친다. 인호는 이를 성기훈에게 보여줌으로써 큰 좌절감을 안겨주려 했다. 인호는 기훈처럼 게임에서 우승했으나 가족을 잃은 아픔을 겪은 인물. 황 감독은 “같은 일을 겪고 다른 길을 가는 두 사람(기훈과 인호)의 신념 대결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인호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보며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을 시즌1·2에 모두 넣은 것도 의도된 바였다. 황 감독은 “참여한 사람들을 벌레, 쓰레기처럼 보고, 저들이 어떤 모습으로 기를 쓰다가 탈락해 가는지 보면서 ‘그래, 세상은 이런 곳이지, 쟤들은 이런 사람들이지’ 이렇게 느끼는 인호만의 의식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1화에서 ‘가위바위보 하나 빼기’ 게임 중 사채업자 김 대표가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지는 장면은 고민을 많이 했다.
“김 대표가 져 주는 방법도 생각했어요. 그건 너무 나간 것 같더라고요. 져줄 수 있을까. 이 사이에서 결정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고통을 좀더 그리고 싶었어요.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상황, 그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게임이 끝나버린. 완벽하게 져준다기보다는 고민에 사로잡힌 인물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해서 최종 결정을 했습니다.”
황 감독의 작품에는 홀어머니가 많이 등장한다. 시즌2에서도 모자 관계인 금자(강애심)와 영식(양동근)이 나온다. 이들에 할애된 장면이 꽤 된다. 황 감독은 “제가 홀어머니, 홀할머니 밑에서 살았고 오랫동안 갖고 있던 기억이라 홀어머니나 홀어머니 아래서 큰 아들이 제 작품에 많이 등장한다”며 “이번엔 꼭 그래서 만든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단초는 시즌1 구슬치기 게임에서 서로 생사를 놓고 싸우게 된 부부였다. 당시 아내가 탈락하자 살아남은 남편도 아내의 뒤를 따른다. 황 감독은 “이 부부가 (탈락자를) 어떻게 결정했을까 뒷이야기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았다”며 “게임 주최자들이 보고 즐기려는 악랄한 마음으로 일부러 부부 같은 특수 관계를 넣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고, 시즌1에서 부부였다면 이번에는 모자를 넣어보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는 이번에 게임을 고르면서 “한국 전통놀이를 외국 시청자에게 많이 소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좀 있었다”고 밝혔다. 시즌1에서 제외시킨 게임들을 뒤져보니 하나씩 하기에는 단순해보여 5개 놀이를 묶었다. 이야기 전개상 필요하기도 했다. 참가자들을 기훈, 현주, MZ세대처럼 그룹으로 모아야 했다. 세 번째 ‘둥글게 둥글게’에 대해서는 “따뜻한 면과 잔인한 면이 동시에 있는 게임이라 도덕적 딜레마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시즌2가 미완으로 끝난만큼 시즌으로 나누기보다 파트1·2로 나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황 감독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그럼에도 시즌을 나눈 건 현실적 문제 때문이었다. 10개가 넘는 회차를 한 시즌으로 공개하자니 길 뿐더러, 시즌2까지 4년이나 뜰 것 같았다. 미국에서 후속 시즌은 1년∼1년 반 사이에 나온다. 파트로 나누면 3개월 정도 두고 공개해야 하는데, 이조차 데드라인을 맞추기 힘들었다. 황 감독은 “지금도 시즌3 후반 작업을 하고 있다”며 “시즌3에 컴퓨터 그래픽이 많다”고 했다. 그는 “시즌3에서는 반란이 처참히 실패하고 기훈이 스스로를 원망, 자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귀띔했다.
황 감독은 지난해 8월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이 할 이야기는 시즌3으로 마무리됐다며 시즌을 이어갈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 후속 시즌을 이어간다면 원작자로서 지켜졌으면 하는 점은 뭘까.
“결국 비판 정신이죠. 현재 전 세계에서 겪고 있는 고통들, 문제의 원인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게임 안에 녹여냈으면 좋겠어요. 게임하다 죽는 이야기들은 세상에 너무 많았잖아요. ‘오징어 게임’이 그래도 차별성을 가졌던 건 그 안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은 일들과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들을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오징어 게임’이라는 타이틀로 그냥 게임하다 죽는 얘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봐요.”
창작자로서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영광을 거머쥔 그는 여전히 꿈이 남아 있다. 그는 “제 최종의 꿈은 욕 안 먹는 작품, 불호가 없는 작품”이라며 “평생 한번 만들 수 있다면 꼭 만들어보고 싶은데 사람의 생각과 의견이 다 달라서 어렵겠죠”라고 말했다.
“평생의 꿈까진 아니지만 다시 영화를 하고 싶어요. 영화라는 매체를 사랑해요. 지금 영화가 너무 안 되고 있잖아요. 영화를 다시 해서 영화 산업에 도움도 되고 싶고 좋은 영화를 남겨서 아직 영화가 살아 있다는 걸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다음 작품은 어떻게든 무조건 영화를 꼭 해볼 생각입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