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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화)

[매경데스크] 일본선 되고 한국선 안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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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국선 시기상조 아닐까요? 일본에선 몰라도 한국에선 어려울 겁니다." 금융사 수장이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장에 선임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 국내 금융사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답변이다.

쓰쓰이 요시노부 닛폰생명(이하 일본생명) 회장이 최근 일본 '재계의 총리'라 불리는 게이단렌 회장으로 내정됐다. 금융사 수장이 게이단렌의 회장이 되는 것은 처음이다. 현 도쿠라 마사카즈 회장(스미토모화학)을 비롯해 히타치, 도레이, 캐논, 도요타 등 일본의 대표적인 제조사들 수장들이 맡아왔던 자리다.

산업자본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한 일본에서 차기 회장직을 두고 경쟁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소니, NTT, 닛폰스틸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제조업체 회장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상황이었다.

일본 여론도 금융사에 우호적이진 않다. 최근 한 달 새 일본 최대 은행인 MUFG와 일본 최대 증권사 노무라 경영진이 각각 사과회견을 열었다. 직원이 고객 대여금고에서 돈을 빼돌리다 적발(MUFG)되고 직원이 강도살인 미수에 연루(노무라)되면서다. 작년 10월 빅4 손보사가 법인 계약서류를 엑셀(프로그램)로 작성하는 관행을 바꾸겠다고 밝혔을 땐 "아직도 저런 회사가"란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금융산업 위기란 얘기도 나온다.

당국 입김이 강한 금융사 출신이란 이유로 회장 선임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있었다. 기시감이 들 정도로 한국과 비슷하다.

분위기 반전에는 해외 확장과 사업영역 확대라는 일본생명에서 이룬 경영 성과가 한몫했다. 일본 기업에 가장 필요한 항목이다. 과감한 인수를 통한 업계 재편으로 일본생명을 확고한 1위에 올려놨다. 일본생명은 지난달 미국 보험사 레졸루션라이프(82억달러·약 12조원)를 사들이며 일본 생보사 역대 최대 인수기록을 갈아치웠다. 5월엔 미국 코어브리지 지분에 38억달러를 투자했다. 작년 초엔 2000억엔(약 1조9000억원)을 들여 일본 최대 요양업체를 사들였다.

일본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온 성과가 금융사 출신 재계 수장 선임에 대한 회의론을 압도했다. 도쿠라 현 게이단렌 회장도 "더 이상 제조업에 집착하는 시대는 아니다"고 지지를 선언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선 "고도성장기 모델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제조업 중심의 재계에서는 글로벌화, 디지털화에 대한 대응에서 뒤처지고 있다"며 "혁신이 발생하기 어려운 상황에선 새로운 게이단렌 수장에겐 제조업의 틀을 넘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을 넘어서려면 곳곳에 스며든 제조업 지상주의, 더 나아가 과거 고도성장기의 틀을 깨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게이단렌에 근무하는 지인은 "게이단렌 회장은 시대가 선택한다는 표현이 이번처럼 자주 등장한 경우도 없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비슷한 상황에도 "일본에선 되지만 한국선 어렵다"는 자조적인 평가가 나오는 것은 우리 금융사들이 일본생명처럼 재계의 변화를 주도한 경우가 드물어서다.

업계에선 금융을 육성보다는 규제대상으로 보는 당국, 걸핏하면 '이자장사만 한다'며 샤일록 취급하는 정치권이나 여론의 분위기도 문제라고 하소연하겠지만 금융업계의 책임도 적지 않다.

신규 수익원 발굴을 위한 혁신을 외치지만 은행·보험사 등의 사업모델은 천수답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고경영진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혼란은 금융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 최근 정치 상황이 불안해진 후 일부 금융사에선 '참호를 구축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만한 일도 벌어지고 있다.

연초 주요 금융지주 회장들은 고객 신뢰 회복을 최우선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다.

[정욱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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